학회 참관기: SIGDOC 2019, Oct 4-6, Portland, OR

김서경
(University of Washington 정보과학과 박사과정)

지난 10월 4일부터 6일까지 포틀랜드에서 열린 SIGDOC 2019에서 “Behind the Starbucks counter: Design Idea of Collaborative Training in Virtual Reality”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일반적인 과학 계통의 학회가 아니라서 생소하실 텐데요. SIGDOC은 ACM (The Association of Computing Machinery) 산하의 소규모 학회로서, 정식 명칭은 “The Special Interest Group (SIG) on the Design of Communication (DOC)”입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의 설명에 따르면, SIGDOC은 “기술적 주제의 문서화, 소프트웨어 개발, 컴퓨터 프로덕트 및 시스템 사용자를 지원하는 데 관련된 지식을 활발하게 교류하는 포럼”입니다.

 

더 간단히 정리하면, 사람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과정 및 경험을 설계(design)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통(communication)을 탐구하는 주제라면 SIGDOC의 성격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이나 사용자 경험 디자인(UX design) 연구자들이 주로 참석합니다. 다만 “소통”이 한 축을 차지하는 탓에 전공을 살려 업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언어학이나 영문학 계통 연구자도 빈번하게 보입니다.

 

제가 거주하는 시애틀에서 포틀랜드까지는 버스로 약 세 시간 반이 걸립니다. 이번에는 느린 기차여행의 묘미를 만끽하고 싶어 일부러 악명 높은 앰트랙을 골랐는데, 아니나다를까 중간에 한 시간 정도 연착을 하더군요.

그림 1. 포틀랜드로 내려가는 앰트랙 식당칸

 

영화에서처럼 식당칸이 따로 있는데, 앉아서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과 바 좌석이 있습니다. 물론 맛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기분 내기는 좋습니다.

 

 

그림 2. 간단한 점심 메뉴. 브렉퍼스트 샌드위치와 드립 커피.

 

 

그림 3. 철로가 해변을 끼고 내려가므로 태평양을 내다볼 수 있다. 맞은편에 앉을걸.

 

도착했을 때는 시애틀 못지않게 날씨가 흐렸습니다. 다만 포틀랜드는 내륙이므로 해양성 기후인 시애틀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여름엔 보통 10도가 높고 겨울엔 10도가 낮으며 날씨도 상대적으로 더 맑다고는 합니다.

 

그림 4. 포틀랜드 유니언 스테이션(Union Station)의 기차 플랫폼.

 

유니언 스테이션은 윌라멧(Willamette) 강 쪽으로 불쑥 나온 지구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는데, 가장 번화한 펄 디스트릭트(Pearl district)와 놉 힐(Nop hill)에 잇닿아 있습니다. 물론 비싸므로 보통 이 근처에서 묵지 않습니다. 윌라멧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면 호손(Hawthorne), 리치몬드(Richmond), 래즈 애디션(Ladd’s Addition) 등 묵기 좋고 걷기 좋으며 재미있는 데가 많지만 이미 여러 번 오가면서 다 가봤으므로 주변에 주택뿐인 리드(Reed) 일대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포틀랜드라 하면 여자 둘이서 놀러 가기 좋은 도시, 백인 고학력자의 도시, 힙스터의 도시, 푸디(foodie)의 도시라고들 하는데, 이번에 묵은 에어비엔비 숙소는 그런 뉘앙스에 걸맞은 곳이었습니다.

 

그림 5. 에어비엔비의 테라스가 딸린 침실.

 

 

그림 6.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예술 작품.

 

묵으며 가장 좋았던 게 아름답게 꾸며진 조식 전용 방이었는데, 미국의 저렴한 유기농 체인인 트레이더 조(Trader Joe’s) 브랜드의 커피와 차, 비스킷, 기타 간단한 과일이 제공됐습니다. 프리 푸드는 늘 대학원생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림 7. 침실 옆에 딸린 작은 방에 준비된 조식 메뉴. 과일과 커피, 차, 가벼운 간식.

 

여장을 풀고 남쪽의 우드스톡(Woodstock Blvd.)까지 약 20여 분 정도 걸어가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림 8. 포틀랜드의 베지테리언 체인인 래핑 플래닛(Laughing planet).

 

시애틀이나 포틀랜드에서는 비건 레스토랑이 비교적 흔한 편입니다. 이 래핑 플래닛은 체인 레스토랑으로 엄격한 비건(vegan)은 아니며 채식, 유기농, 팔레오 식단을 주로 다룹니다.

 

 

그림 9. 내가 주문한 호박, 비트, 생강 절임 돼지고기 보울.

 

철 따라 보통 메뉴가 달라지는데, 가을 시즌 메뉴에는 델리카사 호박과 비트, 기타 뿌리채소가 들어갑니다. 소스는 미소 와사비로 동양풍인데, 이런 스타일의 메뉴는 북서부에서 비교적 흔한 편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뉴시즌에서 간단한 음료와 밤참을 사가기로 했습니다.

 

그림 10. 포틀랜드의 로컬 유기농 그로서리 체인인 뉴시즌(New Season).

 

시애틀에 PCC와 메트로폴리탄 마켓(Met Market)이 있다면 포틀랜드에는 뉴시즌(New Season)이 있습니다. 아마존이 인수한 홀푸즈(Whole Foods)는 이들 앞에 한 수 접고 들어갑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싱싱한 제철 야채와 과일, 여러 다양한 유기농 제품들이 있으므로 한번 꼭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음 날 아침 아홉 시부터 학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장소는 포틀랜드 주립대(Portland State University)로, 주의 플래그십 대학은 아니며 작은 도시 대학입니다. 올해 SIGDOC의 주제는“Broadening the Boundaries of Communication Design”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및 디자인의 흐름을 쫓아가려는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올해 학회에서 중점적으로 모집한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용자 경험, 경험 설계, 사용자 중심 디자인, 활동 중심 디자인, 참여 디자인, 맥락 디자인, 사용성 연구 (User experience,  experience architecture, user-centered and activity-centered design, participatory design, contextual design, and usability studies)

 

2.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결과물 및 과정, 인포메이션 디자인, 인포메이션 설계, 사용자 지원 (Communication design deliverables and process, including information design, information architecture, and user assistance)

 

3.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에 관련된 프로젝트 관리 및 콘텐츠 전략 (Project management and content strategy as it relates to communication design projects)

 

4. 커뮤니케이션이 설계되고 사용되는 방안에 대한 혼합, 정성적, 정량적 연구 (Mixed,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studies of how communications are designed and used)

 

그림 11. 포틀랜드 주립대(Portland State University).

 

첫날 키노트 전의 워크숍 중 ‘Demystifying personas: Three stages to develop a deeper understanding of users’을 예약했습니다. UW 타코마 캠퍼스의 교수로 재직하는 엠마 로즈의 페르소나(Persona) 워크숍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전에 같은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했던 적이 있는데다 주제 자체가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페르소나란 디자인 기법 중 하나로, 개발하는 프로덕트가 대상으로 하는 사용자 그룹을 대표할 만한 여러 특징 및 성향을 조사한 후, 한 명의 프로필로 압축하여 정리하는 기법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디자이너 중심으로 진행되는 페르소나 기법은 지나치게 주관적일 뿐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누락되는 정보가 많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유용하지 못하다는 반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해관계자(stakeholder), 연구자, 그리고 사용자의 의견을 세 단계로 나누어 균형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을 제시한 후, 실제로 그중 한 가지 방법을 시연하는 실습을 진행했습니다.

 

그림 12. 워크숍을 리드 중인 엠마.

 

워크숍 참여자들은 테이블별로 모여 각기 주어진 주제에 맞춰 프로덕트의 이해관계자(stakeholder), 연구자, 사용자의 입장에서 궁금해할 수 있는 질문을 포스트잇에 브레인스토밍하고 (sticky note method), 그것을 입장별로 한 번, 주제별로 한 번 모아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아이디어를 정리해 페르소나를 만들고 그룹별로 소개한 후 워크숍은 성황리에 끝이 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디자인 기법 중 일부는 과학 커뮤니티 및 단체 내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 중지를 모을 때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13-14. 페르소나 아이디어를 위한 실습.

 

워크숍 후 바로 키노트가 이어졌습니다. 발표자는 VMware의 시니어 매니저인 메간 비글로(Megan Bigelow)로, PDXWIT (Portland Women in Tech)의 설립자이자 이사회 멤버를 역임했습니다. 이런 면모를 볼 때 SIGDOC이 지닌 학계와 업계 간 융합적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실제로도 업계 종사자의 참여를 권장하며 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경험을 소논문 형태로 발표할 수 있는 섹션이 따로 있는데, 이는 HCI나 디자인 계통 학회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발표한 논문도 기존 기업을 사용사례로 가져와 최신 테크놀로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기존의 순수학문 분야에 적합한 발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림 15. 커피를 마시며 키노트를 기다리는 참석자들.

 

그림 16. 키노트 발표자인 메간 비글로

 

키노트의 주제는 PDXWIT의 2019년 설문 결과를 통해 보는 디자인 업계의 다양성으로, 백인들 대비 유색인종, 여성, 성 소수자의 응답 간 간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백인 (남성) 응답자의 경우 사내문화가 포용적인 동시에 다양성을 충분히 지향한다고 믿으며, 회사 안에서의 권익을 찾는 데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면 유색인종, 여성, 성 소수자의 경우 그와 반대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한 예로 “동료에 비해 더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상을 요구하겠는가?” 백인의 경우 7%만이 “절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성 소수자의 경우 그 비율이 29%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림 17. 트랜스젠더 직장인의 발언을 인용한 슬라이드.

 

이번 키노트는 제게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앞서 언급했듯 발표자는 학계의 남성 교수가 아닌 업계의 여성 관리자였으며, 그 내용 역시 한국에서는 생각하거나 실행하기 힘든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업계와 학계 간 크로스오버가 잘 되기 때문에 짧은 학회 내에서도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다는 건 분명 SIGDOC의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융합학문의 특성상 주제가 지나치게 발산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엿보였는데, 이 때문에 비교적 비슷하다고 모아놓은 그룹 내에서도 발표 간 주제의 편차가 컸습니다. 때로는 HCI적 접근이라 생각해 들어갔는데 적용대상이나 맥락은 기대했던 내용과 동떨어진 경우가 있어 난감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틀에 걸쳐 재미있게 본 발표를 몇 개 뽑아보겠습니다. 프레임워크 차원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발표는 “Design for CHOICES: Developing A Framework for Behavioral Design in UX & Technical Communication”으로, 테크놀로지, 프로덕트, 서비스와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를 정리한 후 이후 시스템에 대한 가치평가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프레임워크였습니다. 이 프레임워크는 크게 사용자-중심 결정권 대 시스템-중심 결정권, 정보에 관심을 기울일 때 얻는 유익과 손해 두 축으로 갈라볼 수 있습니다. 가령 사용자가 어떤 가스 계량기 시스템을 쉽게 파악하고 덕분에 가스 소모량을 효과적으로 줄여 더 적은 비용을 쓴다면, 이는 사용자-중심 결정권이 큰 동시에, 정보에 주의를 기울였을 때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시스템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죠.

 

그림 18. 유저 중심 vs. 시스템 중심을 나타내는 사분면

 

디자인 방법론은 정성 및 정량적 기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Can I trust my users? The place of self-reported survey data in a biometric world”에서는 언뜻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일 것 같은 생리적 측정에 대비해 흔히 ‘부정확’하다고 알려져 온 자기 보고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을 연구했습니다.

 

자기 보고가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인데,
1. 시간을 측정하는 종류의 과제가 아니며,
2. 피험자가 자신의 경험을 언어적으로 구체화하는 연습이나 훈련을 사전에 받았으며,
3. 자기 보고를 할 때 사회적인 압박이나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연구를 시작한 초창기 때 정량적 접근의 한계를 크게 느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보완해줄 수 있는 정성적 접근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실용적인 방법론보다도 모바일 디바이스나 유명 앱과 같은 프로덕트의 이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파고든 연구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인스타그램이라는 단일 앱을 사례로 삼아 앱의 시스템과 사용자간 상호작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디자인적 “긴장”을 분석했습니다.

 

그림 19. 인스타그램이 포함하는 UX 요소들간의 디자인적 긴장.

 

이 디자인적 긴장은 구문론적 긴장(Syntactic tension), 실증적 긴장(Pragmatic tension), 해석학적 긴장(Hermeneutic tension) 셋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구문론적 긴장이란, 앱 인터페이스가 취하는 여러 상징이나 사인들이 업계나 디자이너들에 의해 관습화된 기준에 어긋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실증적 긴장이란, 앱 인터페이스가 취하는 상징이나 사인들이 실제 세계에서 개념적으로나 기능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케이스에 어긋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해석학적 긴장은 앱 인터페이스가 취하는 상징이나 사인들이 앱 자체의 구조에 바탕을 둔 (이러저러하게 작동하리라는) 믿음 체계에 어긋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뭘 이렇게 쓸데없이 어렵게 썼어…너 문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용자가 프로덕트를 사용할 때 느끼는 불편감의 근원을 표면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론적인 언어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언제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계의 확장”이 주제인 만큼 제 관심주제인 VR의 사용자 경험에 대한 발표도 있었는데,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발표는 “The bounded norms of social virtual reality” 로, 알트스페이스(AltSpace)나 렉 룸(Rec Room)처럼 상업화된 멀티플레이어 VR 내에서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와 상호작용한 경험에 대해 약 20여 명의 인터뷰를 종합했습니다. 세 가지 결론은
1. 실제 세계에서 소통할 때 사용되는 신체적인 시그널은 가상공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2. 사용자가 사회적 규범을 가상공간 내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3. 단 가상공간 내에서 느끼는 임장감(presense) 및 체화된 감각은 여전히 순조로운 상호작용을 이어나가는 데 핵심적이다,
였습니다. 현재 계속해서 진행 중인 연구이기 때문에 결과 역시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체의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받지 않는 사회적 요소들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그림 20. 사회적 VR에 대해 발표 중인 발표자.

 

마지막으로 제 발표는 “Behind the starbucks counter: design solutions for utilizing virtual reality for collaborative training”으로, 최신 테크놀로지 중에서도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VR을 실제 몸을 써가며 협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입니다. 스타벅스를 사례로 사용한 이유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물리적 및 사회적 상황(즉 스타벅스 음료를 만드는 카운터)이 거의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철저히 정성적인 관찰, 인터뷰 및 케이스 스터디 기법을 활용하여 협업 과정을 트레이닝할 수 있도록 VR 환경을 디자인하는 전략 두 가지를 도출했습니다.

 

그날 재미있었던 게, 제 발표를 하려고 어댑터를 연결했더니 그만 프레젠터 뷰가 나오지 않더군요. 청중은 기다리는데 해결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인생 한 번이다, 하고 그냥 애드립으로 줄줄 발표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가장 질문이 많았던 어떤 교수님 왈, 한때 스타벅스 트레이닝 매니저로 일했는데 무척 흥미롭게 들었다며 심심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니, 포틀랜드에 내려온 건 나름 선방이었던가 봅니다.

 

그림 21. 학회를 마치고 엠마와 함께.

 

학회에서는 늘 그렇듯 조식과 점심이 제공되었습니다만, 둘째날은 마침 캠퍼스에서 포틀랜드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날이라 점심을 제공하는 대신 “나가서 사먹고 로컬에 기여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그림 22-23. 흔한 북서부 파머스 마켓의 풍경.

 

이날 따라 날씨가 좋았고 나뭇잎 새로 푸르게 떨어지는 햇살에 홀려 식사도 잊고 한동안 거닐었습니다. 피망을 굽거나, 계란을 부치거나, 피자를 굽는 등 아늑하고 다정한 냄새와 제철 채소들이 가득하더군요. 뭔가 방금 전까지 싱싱하게 살아 있던 걸 우적우적 먹고 싶길래 샐러드볼을 골랐습니다. 야채, 맛있습니다.

 

그림 24. 애호박, 토마토, 잎채소와 밀알 등 곡식을 버무린 샐러드 볼.

 

학회가 (예산도 아끼는 동시에) 그 지역의 커뮤니티에 작지만 이렇게도 기여할 수 있구나 싶더군요. 대규모 인원은 아니지만 생산자-소비자 간 직거래가 일어나는 공간이고, 학회차 온 사람들은 지역의 분위기나 문화를 일부나마 체험할 수 있으니 윈-윈이 아니었나 합니다.

 

학회를 마치고 나니 기력이 없어 적당히 시내를 걸으며 저녁이나 먹기로 했습니다. 전국 최대라는 파웰(Powel) 서점이나, 포틀랜드의 대표 브루어리인 데슈트(Deschutes)나, 차를 마시며 중국식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란수(Lan Su) 가든이나, 5월에 들르면 사자성어 “만화방창”의 이데아를 영접할 수 있는 포틀랜드 장미 정원이나, 하이킹하기 좋은 멀트노마(Multnomah) 폭포 등등은 예전에 다 가봤으므로 그냥 적당히 맛있는 데서 굳 소스 오브 프로틴(과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것 외엔 별 욕망이 없었습니다.

 

그림 25. 포틀랜드의 시내 풍경.

 

대략 번사이드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맛집인 라르도(Lardo)에서 돼지고기와 고수가 든 포크 미트볼 반미를 시켰습니다. 참고로 초심자에게는 김치와 칠리 마요가 듬뿍 들어 있는 코리안 포크 숄더를 추천합니다.

 

그림 26. 샌드위치 맛집 라르도.

 

물론 디저트도 먹어야 합니다. 길 건너 루비 주얼(Ruby Jewel)로 넘어가서 대범하게 아이스크림 샘플러를 시켰습니다. 버터스카치, 딸기, 신선한 민트, 소금 캐러멜, 초콜릿 칩, 바닐라 빈, 허니 라벤더입니다. 다 맛있으니 일단 가서 드셔 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림 27. 포틀랜드는 ‘푸디(foodie)’의 도시로, 맥주, 와인, 아이스크림이 맛있다.

 

학회가 염불이라면 여행은 잿밥입니다. 만일 감수자가 엄격히 학구적인 내용만 리뷰에 포함한다면 아마 이 뒤에 이어질 내용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만, 기대해 봅니다.

 

그다음 날 숙소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그’ 리드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젊고 돈 없던 스티브 잡스가 병을 팔아 (그런 언급은 없습니다만 미 북서부에서 나고 자란 학부생이라면 물론 당연히) 마리화나를 빨며 캘리그라피 수업을 들었던 리드 대학교가 맞습니다. 뛰어난 인물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누르기는 어렵더군요.

 

이 시대 가장 걸출한 풍운아가 잠시나마 몸담았던 리드 대학교는 오레곤 주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로서, 약 40여 개의 전공이 있으며 일부 과학 및 공학 전공은 칼텍 등 유명 대학교와 제휴해 교환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 훌륭한 졸업생들이 있으나 역시 갑 오브 더 갑은 잡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 로망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20대에 다녀 보거나, 이번 생에 인연이 닿으면 60대에 가르쳐 보기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만 할 따름입니다.

 

그림 28. 리드 대학교의 물리학 및 화학과 건물.

 

총총 걸어 들어간 어떤 건물의 3층에 작은 채플이 있었는데, 그 옆의 공지엔 “불경 암송”이라 적혀 있더군요. 마음에 들어 사진으로 남겨 보았습니다.

 

그림 29-30. 채플 및 불경 암송 공지.

 

이날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듯이 푸르렀습니다. 사람은 적고 평화는 가득한 세상을 걷고 있노라니 그 자체로 지친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더군요.

 

그림 31-32. 본관 앞 캠퍼스 풍경.

 

지도를 보니 공연예술 건물이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길래 호기심에 들어가 봤습니다. 방음 시설, 연극 공연장, 즉석 공연(improvisation)이 가능한 계단식 열린 공간 등 시설이 대단히 잘 되어 있더군요. 여기서 수업을 들으면 근사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림 33-34. 리드 대학교의 공연예술 건물의 외관과 내부.

 

2층의 유리를 통해 1층의 춤 및 공연 수련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잘게 쪼개진 빛의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그림 35-36. 춤 및 공연 수련장과 다양한 포스터들.

 

학생회관 식당은 한 가지만 제하면 다른 학교의 식당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건 먹다 남은 음식을 얹어두는 공간이었습니다. 누구든 굶는 학생이 없도록, 그리고 그 음식을 취하는 학생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동료 학생의 존엄을 지켜달라는 문구가 벽에 적혀 있더군요. 제 머릿속에 떠오른 건 ‘탁발’이라는 단어였는데요. 캠퍼스의 선(Zen)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현대의 히피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느꼈습니다.

 

그림 37. 먹다 남은 음식을 다른 배고픈 학생들을 위해 보관해 놓는다.

 

물론 캘리그라피가 빠질 수 없습니다. 사진에 있는 책갈피들은, 여름 방학 내내 지은 시를 학교 곳곳에 걸어 놓고 가장 훌륭한 시를 뽑는다는 콘테스트의 도전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사진의 단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서둘러라 벌레여, 여름은 곧 끝난다네.

 

그림 38-39. 캠퍼스 곳곳에 걸려 있던 캘리그라피들.

 

이렇게 3일간의 포틀랜드 학회 및 리드 대학교 탐방기를 마칩니다.

 

 

그림 40. 포틀랜드를 떠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