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공개된 넷플릭스 SF 시리즈 <고요의 바다>를 둘러싸고 여러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고요의 바다>에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몰입을 방해했고, SF로서의 작품성까지 해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어차피 허구이니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한다,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작품이 주는 메시지에 집중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려 정우성이 제작을 맡고 배두나, 공유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우주 배경의 SF 드라마인데다, <오징어 게임> 이후 기대를 모은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였기에 파란은 더 거셌는데요.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공감하시나요?
<고요의 바다> 속 과학적 오류
<고요의 바다>는 온 지구에 먹을 물이 부족해진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한국도 물 부족에 신음하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 정부 산하에 비밀스레 꾸려진 팀이 물 부족 위기를 타파할 '월수(月水)' 샘플을 가져오기 위해 폐쇄된 달 기지로 떠납니다. 주인공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월수의 치명적인 특징을 알게 됩니다. 바이러스처럼 생명을 숙주 또는 촉매로 삼아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미지의 물질이었던 것이죠. 월수에 감염된 사람은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불어난 물을 숨 쉴 새도 없이 토해내다 결국 질식사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일행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등장하고, 폐쇄 전 달 기지에서 수행했던 실험의 진상이 밝혀지며 주인공 일행은 위기에 처합니다.
과학적 오류는 여러 부분에서 지적됐습니다. 우선 '월수'는 등장인물들이 성분을 분석한 결과 '물'처럼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물질이지만 살아있는 생물과 닿으면 폭발적으로 불어납니다. 증식한 물질도 증식하기 전과 똑같은 밀도와 분자 구성의 ‘월수’입니다. 틀림없이 '질량 보존 법칙'을 위배하는 물질인데 극 중에서는 과학자와 의사를 포함한 일행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증식한 월수도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왜 굳이 증식하기 전의 밀봉된 샘플을 어렵게 찾아야 하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월수가 전염성이 있는 위험한 물질임을 알고도 마스크나 헬멧을 쓰지 않는 모습 또한 어색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방역에 이골이 난 우리 눈에는 더욱이요.
<고요의 바다> 속 달 기지에는 놀랍게도 '인공중력'이 있습니다. 달 표면에서는 지구의 1/6만큼의 중력이 작용하는데, 패널을 조작해 기지 내부의 중력을 지구와 같게 조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극 중 달 기지는 지표면에 고정되어 있는데, 회전하거나 가속하지 않는 구조물에서는 인공중력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구현할 수 있을지 요원한 기술입니다. 또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우주복 없이 맨몸으로 달 표면을 활보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 인물의 특수한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극저온 또는 극고온, 우주 방사선, 낮은 압력, 무산소 등을 버티는 인간형 생물이라는 설정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부분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모순이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온라인 공론장에서 논의가 활발해지며 과학적 엄밀성이 중요하다는 측과 영화적 허용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차는 더 뚜렷해졌습니다. 토론이 과열되면서 상대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는 댓글이 달리기도 하고, 과학적 오류를 허용하는 것은 SF의 장르적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두 입장 모두에 공감하지만 한쪽 입장만으로는 SF라는 장르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연하고 역동적인 장르, SF
과학을 소재로 한 허구의 이야기 SF(Science Fiction)는 휴고 건즈백이 1926년에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를 만들며 “쥘 베른, H. G. 웰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처럼 과학적 사실과 예언자적 통찰이 섞여 있는 매력적인 모험담”을 일컫는 용어로 처음 정의했습니다. 최초의 SF소설로는 보통 메리 셸리의 1818년 작,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이하 프랑켄슈타인)>을 꼽지요.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으로 엄밀한 SF였을까요?
메리 셸리는 당시의 최신 과학기술을 소설의 중심 설정으로 활용했지만, 그 속에는 비약이 있었습니다. 죽은 개구리의 다리에 전기 자극을 주면 다리가 움찔거린다는 것은 실험으로 증명됐지만(실제로 메리 셸리는 이 실험에서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곧 시체를 얼기설기 짜 맞춰 번개를 맞히면 생명이 깃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적 한계를 뛰어넘은 상상력은 ‘인간은 인간을 닮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도 되는가’, ‘이때 인조인간은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등 과학기술에 기반한 윤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이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지금까지도 <프랑켄슈타인>은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지요.
SF 연구자 셰릴 빈트는 저서 <에스에프 에스프리>(2014)에서 ‘SF는 늘 역동적으로 변하는 장르이며 고정된 설명으로는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SF는 인공지능, 로봇, 우주 개척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반면 어떤 SF는 정치, 사회 구조나 문화의 양상에서 과감한 상상력을 펼쳐 나갑니다. SF 걸작으로 여겨지는 어슐러 르 귄의 소설 <빼앗긴 자들>(1974)은 자본주의 행성과 사회주의 행성 사이에서 갈등하다 망명하는 물리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양극단의 사회를 묘사하고 그 속의 개인이 어떻게 살아갈지 사고실험 하는 데에 작품의 대부분을 할애하죠. 기술적 변화보다 사회/문화적 변화를 강조하는 작품을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또한 SF 장르의 중요한 축입니다. SF의 스펙트럼은 이렇게나 넓고 유동적입니다. 과학적 엄밀성은 SF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뿐, 좋은 SF의 필수 요소는 아닙니다.
좋은 SF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현재의 과학에 맞지 않는 부분을 모두 고치면 <고요의 바다>가 재미있고 좋은 SF로 탈바꿈할까요? 일단 '월수'는 극의 전개를 이끄는 중요한 설정인 만큼 과학적 엄밀성을 포기하더라도 밀고 나가야 합니다. 물 부족에 시달리는 인류가 오히려 물(월수)로 인해 '익사'한다는 아이러니는 얼마나 극적인가요! 그러나 등장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감염 이후 사망까지의 시간을 임의로 조정하는 바람에 월수가 쌓아온 압도적인 신비함과 공포를 무너뜨리고 시청자에게 허탈감을 주었습니다. 오히려 월수의 핵심적이고 특정한 성질을 최대한 활용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면 훨씬 짜임새 있는 SF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설정이라도, 그것이 가능한 세계를 얼마나 일관성 있고 체계적으로 상상하는가에서 SF 장르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SF 거장 어슐러 르 귄은 1966년 발표한 작품 <로캐넌의 세계> 속에서 ‘앤서블(Ansible)’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요. 지금까지 밝혀진 물리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통신할 수가 없지만, ‘그럴 수 있다면’ 펼쳐질 세상을 그리기 위해 고안한 기술입니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 서로 멀리 떨어지면 앤서블 없이는 같은 사회를 이룰 수 없을 테니까요. 이후 여러 SF 작가들이 자기 작품에도 앤서블을 차용했고 이제 SF 장르에서는 별도의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앤서블 덕분에 SF는 훨씬 다양한 사회 구조와 문화를 견고하게 상상하고 사고실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SF의 바다를 유영하는 느긋한 방법
저는 <고요의 바다> 속 물 부족 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SF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모든 시민은 식수 배급권 등급을 부여받고, 주유소처럼 생긴 배급소에서 등급에 따라 물을 받습니다. 곧 사회적 지위와도 직결되는 이 등급 시스템 때문에 비참해진 사람들은 등급을 폐지하고 물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시위에 나서지만 식수 평등 분배 법안은 의회에서 계속 부결됩니다. 영아 생존율이 낮아지고, 반려동물 제한법이 시행되고, 적은 물로도 식량을 키울 수 있는 공장형 농장 기술이 주목받습니다. 이렇게 물 부족으로 인해 변해가는 여러 측면의 사회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이 너무 깔끔해서 물이 없는데 어떻게 씻을지도 궁금했고요.
이처럼 과학적 엄밀성이나 첨단 과학 요소에만 맞추었던 초점을 살짝 돌려보면 훨씬 느긋하고도 다채롭게 SF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SF도 문학이며 예술 작품인 만큼 ‘무엇이 좋은 SF냐’에 대해서는 각자 기준이 다르겠지만 단순히 얼마나 과학적으로 엄밀한가를 우선하느라 좋은 SF 작품을 놓치거나, 과학적으로 따지는 것이 어렵다며 SF의 재미를 지레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SF는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변화를 어떤 장르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냅니다. 그렇다면 SF는 세상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숨 가쁘게 바뀌는 오늘날에 우리가 더 만끽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요? 사회와 과학, 과학과 사회의 연결고리라는 의미도 곱씹는다면 금상첨화겠죠. 앞으로 한국에서도 더 많은 SF 콘텐츠가 만들어져서, 어떤 SF가 더 좋은 SF인지 훨씬 많은 비교 대상을 놓고 판단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