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자: 이대한 (성균관대학교 생명과학과, ESC 회원)
본 글은 이대한 님이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로, 허락을 받고 ESC 숲사이에 소개합니다,
#1. 느닷 없는 R&D 예산삭감 파동을 일으켰던 정권이 몰락하고, 이제 두 달 안으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여러 공약이 나오고 있는데, 여러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다. 일선에 있는, 가장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잘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진짜로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2. 젊은 나이에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우수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는 내 포닥 지도교수 Richard Benton(스위스 로잔대학)은 거의 대부분 본인의 오피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름 휴가와 겨울 휴가를 포함해서 1년에 한 달 이상을 ('휴가 중'이라는 이메일 자동응답 모드를 켜고) 꼭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모범을 보였다. 연구에 온전히 집중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 리프레시 된 머리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더욱 깊이 파고드는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정말 좋은 연구환경이라고 생각했다.
#3. Richard의 라이프 스타일은 한국에서 좋은 연구 성과를 올리는 과학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삶이다. 좋은 연구 성과를 위해서는 훌륭한 인력과 인프라가 필요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구비가 필요하다. Richard의 경우 이 연구비를 크게 두 개의 펀딩 소스에서 충당했다. 하나는 스위스 과학재단의 연구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럽연구위원회인 ERC의 연구비였다. 장기간의 큰 덩어리의 연구비를 받기에 연구비를 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는 연구 그 자체에 더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4. 이에 반해 한국의 과학자들은 일년 내내 끊임없이 연구비 제안서 쓰는 것에 시달린다.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몇 가지를 짚자면 (1) 지원할 수 있는 연구비는 많지만, (2) 많은 경우 연구비 선정률이 매우 낮고, (3) 연구비의 규모나 기간이 적다/짧다는 점이다. 이를 종합하면 한국에서 연구자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최적의 전략은 끊임없이 제안서를 써서 가능한 많은 수와 금액의 연구비를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제안서를 쓰는 것 자체가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본인의 연구를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성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안서를 써야하는 빈도가 너무 잦으면 그러한 효용보다 비용이 훨씬 커진다. 1년에 10개의 제안서를 쓰면서 그 과정에서 깊은 성찰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5. 과학에 있어서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과학자 대다수가 포진한 대학으로 한정해서 생각해보자면, 정부는 과학자들을 직접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선발한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라는 방식으로 지원한다. 이러한 정책이 잘 작동하려면 좋은 연구자들에게 연구비가 잘 배분될 수 있도록 하고, 이러한 연구비를 받은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전자는 공정성의 문제라 많이 이슈가 되지만, 사실 후자의 문제도 나는 매우 중요하며 한국 연구 시스템이 이 측면에서 후진적이라고 느낀다.
#6. 내가 2022년 여름에 귀국한 이후로 느끼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종류의 연구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정부가 과학자들을 위해 새로운 지원책을 들고 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진짜 필요한 지원책은 새로운 종류의 연구비가 아니다. 이미 있는, 잘 짜여진 연구비 시스템을 두텁게 하는 것이 일선의 과학자들이 바라는 바이지, 자꾸 새로운 연구비를 알아봐야 하고 선정률도 매우 낮은 과제에 끊임없이 제안서를 써야하는 굴레에 밀어 넣는 것은 연구력을 저하시키는 매우 큰 요인 중 하나이다.
#7. 나는 이미 한국의 엘리트 연구 지원 시스템의 핵심 축은 잘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우수신진-중견1/2-리더로 이어지는 체계가 잘 자리를 잡은 것 같고, BRL의 기간이 너무 짧다는 문제를 제외하면 집단연구 지원 체계도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연구비 평가 시스템도 상당히 공정해진 것 같고, 개인 및 집단 연구 1인 1과제, 3책 5공 등 수월성과 평등성의 균형도 나름 잘 잡혀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 핵심 축이 왜소하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왜소한 이 핵심 축이 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더욱 개악되고 그 결과 일선 과학자들에게 너무나 큰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8. 나는 대한민국을 과학강국으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개혁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정책을 내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잘 잡은 신진-중견1/2-리더 트랙의 개인과제와 SRC/BRL 등 집단과제를 양적으로 늘려서 우수한 연구자들이 안정적으로 수주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정공법이고 단기간에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력을 올려 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연구개발 예산을 늘린다면 이 부분에 집중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나오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들을 살펴보면 다른 정권들처럼 높은 확률로 카르텔이 어른거릴 수밖에 없는 탑-다운 기획과제들이 양산될까봐 걱정이다.
#9. 그런데 이런 정책은 인기가 있을 수가 없다. 정권이나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뭔가 새로운 일을 벌여야지 공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뉴스거리가 되는 기획과제가 탄생하고, 이러한 기획과제가 만들어지고 누군가 그 과제를 따는 과정에서는 카르텔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수밖에 없다. 한국에 학회가 너무나도 많고, 그 학회들에 열심히 나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도 이처럼 과학기술 정책이 일선의 과학자들이 아니라 ‘뉴스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좌지우지 되는 탓이 크다.
#10. 비슷한 맥락에서 인기가 없지만 획기적으로 연구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제가 ‘간접비’이다. 나는 새로운 대학지원사업이나 기획과제를 만드는 것보다 간접비를 높이는 것이 같은 정부 예산을 쓰더라도 효용이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학들은 너무 가난하다. 특히 사립대학들은 정부의 등록금 억제 정책으로 재정이 너나할 거 없이 부실해졌다. 코어 퍼실리티 구축 등 글로벌 스탠다드의 연구중심대학 구축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외국에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고 한국에 귀국한 과학자들이 그곳에 남았다면 받았을 스타트업의 반이나 반의 반이 아니라, 0을 하나 뗀 1/10 정도의 금액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건물 지을 돈도 없어서 신임교원들 공간 문제로 신음하지 않는 대학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록금을 대폭 인상할 수 없다면, 나는 가장 합리적인 대학 재정 확충 방법이 간접비 인상이라고 본다. 간접비는 우수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연구비를 딴 사람들의 소속 기관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를 더 잘하는 곳에 더 재정을 많이 확충해주는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본다. 반면 자꾸 새로운 대학지원사업을 만들어서 대학들을 줄 세우기 하고 그러한 사업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는 것은 정치적인 요소가 더 많이 개입하고, 그러한 사업을 또 준비하고 제안서를 써야하는 과학자들의 연구력 낭비이다. 정부에서 지정한 사업으로 재정을 지원하면, 대학에 꼭 필요한 부분에 집행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도 핵심적인 문제다.
#11. 과학자들이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연구 이야기? 거의 100% 확률에 가깝게 연구비 이야기를 한다. 어떤 학회 뒷풀이에서는 농담으로 ‘오늘만은 제발 연구비 하지 말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다. 과학자들이 나누는 이야기에서 연구비의 이야기가 줄어들고, 연구 자체의 이야기가 늘어난다면 그만큼 혁신적인 연구들이 비례해서 늘어날 거라고 믿는다.
#12. 돈은 권력이다. 지금까지 대학과 과학자들에게 돈을 지원해 온 사람들이, 돈에 딸려 오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강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국가 지도자라면, 그러한 권력이 아니라 일선의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끊임없이 주말과 연휴를 반납해가며 제안서를 써야하는 삶이 아니라, 내 지도교수 Richard처럼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일 테다.
작성자: 이대한 (성균관대학교 생명과학과, ESC 회원)
본 글은 이대한 님이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로, 허락을 받고 ESC 숲사이에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