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후기]Sense and Sensibility - 시공간의 진·선·미, '나'를 매만지다

블랙소스
2026-01-01
조회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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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얼마 전 포항을 방문해 특강을 하고 갔습니다. 방송으로나 책으로나 유현준 교수의 시선을 많이 접하셨을 텐데 또 현장에서 직접 목소리로 전해 듣는 기분은 색다르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공개적인 자리에서 구사하는 언변의 결도 더 생생하게 느껴 보고 말입니다. (참고로 숲사이에만 공개한 글은 아닙니다.)


[2025년 12/18(목) POSTECH 미래지성 마스터클래스 제6강 유현준 '공간 인간' 후기]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

  - 화이트, <네모의 꿈> 중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투성이 아니냐는 동요 같으면서도 꽤 풍자적인 노래다.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도, 3분이 조금 넘는 그 짧은 틈에 오디오와 컴퓨터, 달력과 지갑을 하나씩 짚어 가며 ‘네모’를 서른일곱 번이나 되풀이한다. 아기자기하고 우스워서 따라 부르다가, 어느 순간 더러 씁쓸해지기도 한다. 네모는 단지 모양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정렬과 적층, 저장과 분류가 손쉽게 가능해지는 규격, 심지어는 어떤 방식이다. 금을 긋고 벽을 세우며 시작된 구획화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거듭되다 못해, 이제는 그 안쪽마저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칸과 칸, 규격과 규격으로 촘촘해지고 길들게 되었나 싶다.

 

유현준 건축가의 강연은 바로 문명사 초기의 그 규격, 안과 밖을 나눈 벽에서 출발해, 계단과 광장, 높이와 시선, 그리고 결국에는 확장과 네트워크로 이어졌다. 저장이 내일을 만들고, 내일이 계획을 만들고, 계획이 시선을 모으고, 모인 시선이 권력을 만든다—그 단순한 연쇄가 수천 년을 가로질러 우리 곁까지 도착한 현재를, 90분 남짓한 전개로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권력은 늘 '위를 향하는 감각'을 불러낸다. 하지만 그 연쇄의 핵심은 ‘높이’ 그 자체가 아니라, 높이가 만들어내는 매개다. 매스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높이는 곧 미디어였고, 계단은 그 미디어로 올라가는 편집 장치였다. 누가 어디에 서고, 누가 무엇을 올려다보며, 누가 누구의 시선을 독점하는지—그 배치가 말보다 먼저 공동체를 설득한다. 이런 해석을 들으며, 지금도 매일 어떤 ‘계단’을 오르내리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돌로 만든 계단 같은 장치는 사라졌거나 유물처럼 남았더라도, 시선을 모으는 장치는 늘 다른 얼굴로 돌아오는 법이니까. 

 

연사는 그런 장치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주 오래된 한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피라미드! 우리는 피라미드를 늘 ‘거대한 무덤’ 정도로 알고 있지만, 강연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무덤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체력이었다. 생활을 편하게 만드는 도구도 아니고, 사람을 살게 하는 생필품도 아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돌을 떼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옮겨 와 쌓아 올리는 일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다. 

 

철저한 ‘네모의 논리’로 보자면 피라미드는 실패작이나 다름없다. 20년이 넘는 세월과 수만 명의 인력을 쏟아부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150m 높이에 이르렀지만, 그곳은 사람이 살 수도, 곡식을 저장할 수도 없는 거대한 돌무더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비효율을 감당하는 순간,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어떤 ‘표현’을 완성한다. 쓸모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문명을 만든다는 말은, 이런 장면에서야 비로소 실재감이 생긴다. 

 

이집트는 이 거대한 ‘낭비’로 주변국을 압도했다. 그것은 무기를 들이대는 방식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있는 규모 자체가 남기는 억제의 심리—‘저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상대의 마음에 먼저 심는 방식으로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측량과 조직, 공학이라는 센스(sense) 위에 기억과 권위, 상징이라는 센서빌리티(sensibility)가 포개지는 순간, 단순한 돌무더기는 하나의 질서가 되고, 하나의 기억이 되고, 공동체의 무게가 된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네모난 필수재들만이 아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필요 바깥의 그 잉여가 삶을 ‘살 만한’ 것으로, 우리를 더욱 사람답게 바꾸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무용’이란 기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능이 너무 크고 넓어서, 우리가 익숙한 잣대—당장 편익을 늘리는가, 생산성을 끌어올리는가—로는 번역이 잘 안되는 종류의 기능이다. 장자의 나무 이야기가 잠깐 스친다. 곧고 반듯해서 재목이 되는 나무는 먼저 베이고, 뒤틀리고 옹이져 쓸모없다는 이유로 남겨진 나무가 오래 살아 그늘을 만든다는 이야기. ‘무용지용(無用之用)’은 결국, 쓸모의 부재가 아니라 쓸모의 정의를 넓히는 감각이다. 

 

현세에서는 무엇이 '피라미드'일까? 목적이 같아서가 아니라, 각 시대의 최첨단 기술과 조직력이 응축된 결정체임에도, 먼저 사회로부터 같은 질문—“대체 그게 무슨 쓸모냐”—을 받는 거대 구조물로서 말이다. 초대형 입자가속기는 더없이 적확한 예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무덤’이기 전에, 그 시대 최고의 공학이었다. 돌을 쌓는 기술만이 아니라, 돌을 떼어내고 옮기고 정렬하고 측량하며 수만 명의 삶을 조직하는 기술—문명의 운영체제적 정점. 그런데도 냉정한 비용 대비 효율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은 이를 자꾸 ‘무용’의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입자가속기는 이 오해가 가장 현대적으로 반복되는 자리다. 우리가 ‘쓸모’를 묻는 동안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현존 최대 크기(약 27km)의 거의 4배인 100km급 차세대 고리(ring)가 청사진 속에서 자라고 있다. 더 큰 원은 단지 더 큰 장치가 아니다. 한 세대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의 크기, 그리고 그 질문을 끝까지 검증하려는 인내의 크기다. 현대의 가장 정교하고 강력한 초전도 자석과 진공, 집채만 한 검출기, 초거대 규모 데이터와 계산, 국제 협업과 장기 운영...... 이 모두가 모여야 비로소 “한 번”의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는 때로 의료나 산업의 가장 실용적인 혁신도 낳지만, 역설적으로 탄생과 지속의 순간에는 늘 같은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왜 그런 데 돈을 쓰냐.” 

 

피라미드가 한 시대의 ‘기술’로 공동체의 역량을 드러냈다면, 입자가속기는 한 시대의 ‘검증’으로 공동체의 태도를 드러낸다. 빠른 답을 만드는 능력뿐 아니라, 느린 확인을 끝까지 견디는 능력. 강연이 건네는 진(眞)·선(善)·미(美)의 삼각형이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진’은 ‘맞다’가 아니라 ‘끝까지 확인한다’는 태도에 가깝고, ‘선’은 그 확인을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으로 지탱하는 구조며, ‘미’는 그 구조가 남기는 잉여—아마, 말로 다 환원되지 않는 무게와 울림이지 싶다. 쓸모의 의구심 앞에서, 입자가속기가 직접 나라를 수호하지는 못해도, 수호할 가치를 품은 나라로 만든다고 설파한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의 말이 유난히 오래 남는 이유다. 

 

피라미드는 오랫동안 인간이 만든 ‘최고 높이’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연사가 에펠탑을 예로 들며 말했듯, 철골과 유리를 품고 솟은 탑과 빌딩이 하늘을 재정의하기 전까지는. 높이는 권위를 부르고, 멀리서도 보이는 것은 힘이 되던 시대. 

 

그런데 강연은 결국, 시선을 모으는 장치가 언제나 ‘위’로만 향하지는 않는다며 선회했다. 원형극장. 이 대목은 “둥글어서 아름답다”가 아니라, 감정을 동기화하는 기술로 등장한다. 1만 2천 명이 같은 이야기를 같은 시간 안에서 통과하고, 같은 장면에서 숨을 멈추는 경험. ‘선’이 누군가의 선한 마음이 아니라 서로서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공통의 리듬이라면, 그 리듬은 기분으로 생기지 않는다. 설계된다. 그리고 그 설계는 종종 ‘비용 대비 효율’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오늘날 더 날카롭게 비치는 것은, 우리가 “함께 본다”는 경험을 너무 쉽게 대체했다고 믿기 때문일지 모른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각자 다른 피드를 보고, 다른 추천을 받고, 서로 다른 감정 상태로 하루를 끝낸다. 연결은 늘었는데 동시성은 줄었다. 동시성이 줄면 공감이 줄고, 공감이 줄면 ‘선’은 윤리 교재의 문장으로만 남는다. 알고리듬은 여기서 유능하다. 각자의 화면 안에, 각자의 네모난 확률로 정렬된 세계를—매끈하게—배달한다.)  

 

원형극장이 공동체의 감정을 동기화했다면, 도서관은 공동체의 지식을 동기화한다—세대를, 세기를 넘어. 그래서 강연의 후반부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은 지식의 ‘안쪽’을 만든다. 흩어진 지식을 한곳에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세계는 달라진다. 지식이 개인의 몸 안에만 머물던 시대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자기 안의 세계를 통째로 넘겨주는 일. 그런데 도서관이 생기면서 저장은 개인의 수명을 넘어선다. 지식이 오래 살아남자, 비로소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한곳에서 만나고, 우연히 결합하고, 폭발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은 그 폭발의 전형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네모난 땅 위에서 앞만 보고 걸을 때, 에라토스테네스는 “왜 우물에 그림자가 없을까?” 같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시에네의 우물, 알렉산드리아의 그림자, 그리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각각은 당장 먹고사는 데 별 도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셋이 결합하는 순간, 지구의 둘레라는 새로운 지식이 튀어나온다.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자체보다, 둥근 세계를 측정 가능한 현실로 끌어왔다는 실천이 중요하다. 반복 가능하고, 반증 가능하게—누구나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진’은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생각을 손에 잡히는 틀로 다듬는 데서 자라난다. 

 

이 역사가 인상적인 건, 진리가 “한 번에 번쩍”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진리는 대개 느슨한 시간 속에서, 목적이 서로 다른 것들이 어쩌다 같은 자리에 모였을 때 생긴다. 누구도 거리와 그림자를 측정한 사람이 훗날 세계의 크기를 바꿔놓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연은 어느 순간, 질문을 바꿔 놓는다. “무엇이 유용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유용함의 범위를 바꾸는가.” 

 

둥근 것을 둥글다고 알아보는 데 필요한 조건은 늘 “당장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의 반대편에 있다. 느슨하고, 우회적이고, 때로는 한참 돌아가는 것. 그 느슨함이 없으면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우회에서 발생하는 폭발이야말로 결국은 가장 덜 낭비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쓸모만 좇느라, 쓸모의 기준을 영영 바꾸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미세한 최적화만 반복하는 도그마—그것이 진짜 비싼 낭비일 수 있으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강연이 아닌 역사에서) 등장하는 인물,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 1930년대 프린스턴. 플렉스너는 고등과학원(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이하 IAS)을 설립했다.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를 주장하는 에세이에서, 즉각적 실용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 순수한 탐구가 오히려 가장 큰 가치를 낳는다고 했다. 

 

보고서, 논문 편수, 특허 따위—그런 네모난 요구를 잠시 치워 두고, “생각하라”고만 말해주는 파라다이스. 도서관이 지식을 보존하는 안쪽이라면, 그 연구소는 지식을 성과라는 네모로 자르지 않도록 사유를 보호하는 안쪽이었다. 당장 성과를 요구하지 않는 시간, 평가표의 칸을 비워 둔 자리, 그리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복도. 그 공백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기원임을 우리는 선명하게 실감했다. 

 

더욱 극적으로, 2017년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는 플렉스너의 글을 새로 펴내면서 당시 IAS 원장이던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Robbert Dijkgraaf)의 에세이(<내일의 세계>)를 함께 실었다. 데이크흐라프는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를 다소 잔인하게 소환한다. “내일의 세계”를 내건 당시 박람회장은 자동화된 기계, 첨단 소재와 번쩍이는 소비의 미래가 가득했지만, 정작 곧 세계를 뒤집을 두 가지 기술—디지털 컴퓨터와 원자력—의 기척은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미래는 늘 전시장에 먼저 도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복도와 방, 누가 무엇을 해내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먼저 자란다. 사유의 안쪽을 마련해 두는 일. 그 안쪽이 있어야만 어떤 폭발은 언젠가가 아니라,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난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라스베이거스의 거대한 전시장에 전 세계가 모여 “미래”를 구경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물론 그런 자리도 필요하다. 사람들의 감각을 동시화하고, 산업의 리듬을 맞추고, 서로를 자극한다. 하지만 데이크흐라프의 시선을 가져오면, 묻게 된다—그 화려한 미래의 기술과 제품, 라이프스타일 쇼윈도에, 정말로 다음 세대를 뒤집을 씨앗은 얼마나 들어 있겠냐고. 진정한 혁명은 대개 전시장 조명 아래보다, 조명 밖에서 시작되곤 한다. 진짜로 세계의 규칙을 바꾸는 진보는 대체로 고요한 다른 자리에서 자란다. 현 “AI 시대”라고 부르는 전환기도, 어느 날 전시장에 떨어진 유행이 아니라—수학, 통계, 물리, 언어, 인지, 철학 같은 오래된 기초의 축적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며 터져 나온 결과다. 

 

그렇게 태동한 데이터와 AI라는 ‘전시장 밖의 미래’는 오히려 전시장의 얼굴이 되어버린 시대를 통과하는 중이다. AI는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의 바다에서 그럴듯한 정답을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AI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왜?”를 묻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물에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는 에라토스테네스의 관찰은 데이터로는 들어올 수 있어도, 그 사실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그 불편한 경이를 붙잡는 일—은 다른 종류의 자질이다.  

 

AI 시대에 답을 더 빨리 뽑아내는 능력만으로는, 질문의 모양이 네모로 굳어버린 세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자주 “언제까지, 얼마만큼, 어떤 지표로”라는 칸에 들어오는 것만을 세계라고 부른다. 하지만 진(眞)이 자라는 토양은 대개 그 반대편에 있다—플렉스너가 보호하고 확장하려 했던 영역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 ‘네모난 질문’의 습관과 정반대의 가치가 점점 제도와 정책 밖으로 밀려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AI 예산이 커지고 산업 정책이 굵어질수록, 순수 연구나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질문을 낳고 감각을 단련하는 토양—는 “성과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사각지대에 놓인다. 오죽하면, 1조 원이 넘느니 마느니 하면서 집중하는 도구주의적 집행보다는, 규모가 비슷한 예산이라면, 차라리 “한 가구당 10만 원의 고전 구매권”을 지급하는 캠페인이야말로 더 과감하게 현실적인 AI 시대 정책이라는 생각마저 들겠는가(가령, 1,000만 가구 × 10만 원/가구 = 1조 원이니까!). 세대마다 MS-Windows 같은 운영체제가 아니라 <프린키피아> 한 권쯤은 소장한 나라—낡은 지식을 숭배하자는 말이 아니라, 세계를 제1원리적 사고로 다시 묻는 습관이 생활화한 나라. 그런 공동체가 결국 AI와 공존하는 슬기를 가장 먼저 배울 테니까. 바로 수호해야 할 이유와 의미가 넘치는 르네상스적 나라가 그러하지 않을까. 통일 신라나 피렌체가 꽃피운 찬란함이 부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미(美)는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책 한 권이 집안에 남기는 공기와 울림—생각이 존중받는 분위기다. 

 

강연은 확장과 네트워크 개념을 유려하게 요리하는 사례를 나열하며 열린 물음으로 끝맺었다. 영토의 확장이든, 물류의 확장이든, 도시의 밀도든, 로마의 도로망과 아치든, 컴퓨터를 연결한 망이든—사람과 사람이 더 멀리, 더 자주, 더 촘촘히 연결될수록 공동체는 다른 속도로 성장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확장에는 언제나 한계가 따른다. 더 높게, 더 넓게, 더 빠르게—그 ‘바깥’은 언젠가 포화에 닿기에, 연사가 남긴 결어로서의 질문은 당연했다. 다음 확장의 방향은 어디인가. 우리는 무엇을 더 늘려야 하는가. 

 

나름의 답을 내리면, 우리 안쪽의 어딘가가 바라봐야 할 방향이자 대상일 듯하다. AI가 그리고 채우는 네모가 정교해질수록, 인간은 그렇게 각이 지지 않는 '영토'를 더 의식적으로 돌보고 키워야 한다—진·선·미는 그때 비로소 ‘교훈적 가치’에 그치기보다는, 복잡한 세계를 견디는 감각이자 생활의 언어로 다시 익혀야 한다. 이 언어를 품는 sense와 sensibility야말로 디지털 대홍수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방주다. 그곳은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와 나를 매만질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혁명적인 공간일 테니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연결하고 확장하는 미래를 꿈꾸어야 할까? 마저 끝까지 노래를 불러 본다. 

 

......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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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