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과학자와 피아노 #53. 한 해의 88일째 날을 기억하는 한 가지 방식

블랙소스
2026-04-02
조회수 121

94fbd517d56fb.png


윤년이 아니라면 3월 29일은 세계 피아노의 날이다. 한 해가 열리고 88일째 되는 날이다. 피아노 건반이 88개이니까. 2015년 독일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닐스 프람이 좀 한심해 보일 수 있지만, 새로운 기념일을 알려 한다는 겸손한 선언과 함께 시작한 날이다. 프람은 첫 피아노의 날에 높이 3.7m짜리 클라빈스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 연주를 녹음해서 무료로 풀었다. 무언가를 기념하는 데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 피아노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88이라는 수는 흥미롭다. 피아노 페스티벌에서도 간간 이 88이라는 숫자를 이용한 슬로건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왜 하필 88개일까. A0에서 C8까지, 가장 낮은 음 약 27.5Hz에서 가장 높은 음 4,186Hz. 이 88개는 옥타브 단위로 치면 7.25옥타브다. 한 옥타브가 올라갈 때마다 진동수는 2배가 된다. 즉, 최저음 대비 약 2의 7제곱, 정확히는 7.25제곱이니까, 27.5 X 2^7.25 = 4186Hz가 나온다.

여기서 재밌는 계산이 한 번 더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산을 다르게 하는 건 일종의 검산이기도 하다. 위 정보로부터 한 음 사이는 진동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 수 있겠지? 즉, 음이 88개니까 음 사이는 87개다. 이 숫자로 7.25를 만들려면 12가 필요하다. 즉, 87/12 = 7.25다. 그럼, 이 12는 어디서 나왔을까? 잠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한 옥타브는 그 이름의 Octa-, 이 접두어로 인해 8이라는 숫자를 연상하게 된다. 한 옥타브 처음 시작에서 다음 옥타브 처음 시작까지 음을 짚으면, 이 둘을 포함해 전부 8개의 흰 건반이 그 간격에 존재한다. 그럼 12와는 무슨 관계지? 곧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흰 건반은 7개다. 하지만 피아노에는 검은 건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5개다. 따라서 총 12개, 반음 간격이 옥타브의 구성이다. 따라서 반음이 올라가면 진동수는 2^(1/12) = 약 1.05946배가 커진다.

이 88개 범위를 넘어가면 보통 사람의 귀로는 음의 높낮이를 분별하지 못한다. 너무 낮으면 웅얼거리는 진동으로, 너무 높으면 날카로운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다. 즉 88개의 건반은 인간의 청각이 '음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피아노는 인간의 귀가 허락하는 한계까지 정확히 채운 악기인 셈이다. 1880년대 스타인웨이가 이 숫자를 확정했을 때, 그것은 미학적이기보다는 음향학적 결정이다.

1880년대라니? 그렇다면 그 전에는 건반이 88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베토벤이 처음 작곡을 시작했을 때 표준적인 포르테피아노의 건반은 61개 — 약 다섯 옥타브, 모차르트와 하이든 시대의 범위다. 베토벤은 피아노 건반 수와 함께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 1803년 파리에서 받은 에라르 피아노는 66건(5옥타브 반), 1818년 런던의 브로드우드가 보내준 피아노는 73건(6옥타브), 1825년 경의 그라프 피아노는 78건(6옥타브 반). 하지만 베토벤의 상상은 늘 악기보다 앞서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피아노에서나 가능한 음들이 들어간 작품이 나오고는 했다. "피아노는 불충분한 악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베토벤이 죽기 직전 카를 홀츠에게 남긴 말로 전해지는데, 소나타 32곡을 비롯해 건반의 끝과 싸운 사람의 총결산이다. 그 가운데서도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는 가장 극적인 사례지 싶다. 당시에 4악장 전부를 연주하려면 저음과 고음의 음역대가 다른 피아노 두 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베토벤이니만큼 분명 궁여지책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을 법하다. 그렇다면 현대 피아니스트들은 88개의 건반을 쓰니 아무 문제가 없는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시 궁여지책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건반 88개짜리 스타인웨이 앞에 앉아, 베토벤이 61개 건반 안에서 고심스럽게 창안한 선택을 존중해 그대로 연주할 것인가? 아니면 '베토벤이 어쩌면 88개 건반을 가졌더라면 분명 이렇게 썼을 것'이라는 상상이나 합리적 추론으로, 원래 의도했을 법한 음을 짚을 것인가? 피아니스트마다 선택은 다를 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기로 자체가, 61개의 건반과 88개의 건반 사이에 있는 간극 — 베토벤이 현실에서 가졌던 피아노와 머릿속에서 울리던 피아노 사이의 거리 — 를 대변한다. 넘치면 넘치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문제다.

오늘, 한 해의 88번째 날, 폭주하는 일더미에 깔려 이 88개 건반을 하나도 만질 수가 없어 아쉽다. 베토벤의 61개 건반이 88개가 되기까지는 반세기가 더 걸렸다. 악기는 마침내 이 악성의 상상을 결국 따라잡았다. 집요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베토벤, 현대의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다면, 어떤 작곡을 하고 어떤 연주를 했을까? AI에게 시켜 보면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까?

9166e223788b8.jpg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자와피아노

+ 과학자와 피아노 연재 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