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과학자와 피아노 #56. 제 몸값을 증명하는 300K짜리 피아노, 0K에 가까워도 풀기 어려운 난제 앞에서 (상)

블랙소스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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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용어 하나, 0K, 300K? 

아주 쉬운 과학 상식일지 몰라도, 혹시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계실 터라, 잠깐 잔소리 같은 설명부터. 

음악에서는 약어를 K로 쓰면 비교적 흔하게는 모차르트, 스카를라티의 작품 번호 약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모차르트는 쾨헬 번호, 스카를라티는 커크패트릭 번호라는 의미로 K를 쓰지만 작품 번호의 그 숫자는 알파벳 뒤에 온다. 엄밀히는 약자니까 뒤에 '.'도 찍히고. 

그래도 K가 사람 이름의 약자라는 공통점은 여전하다. 여기서는 켈빈, 즉 절대 온도의 단위를 나타낸다. 0K는 섭씨 영하 273도. 즉, 300K면 일상의 상온(섭씨 27도)을 상징하는 온도로 쓰인다. 단, 과학에서는 사람 이름의 첫 글자를 따라 단위를 정해도 '.'는 당연히(?!) 안 붙인다. 

그럼, 0K에서 뭐가 풀리기 어렵다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할 일의 순서를 정한다. 열 가지라 하자. 어떤 순서로 하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진다. 첫 번째 할 일은 10가지 중 택 1, 두 번째는 9가지 중 택 1. 10! = 3,628,800. 삼백육십만 가지가 넘는다. 이 중 최적의 순서가 하나 있다 치면, 전부 따져보는 수밖에 없는가? 할 일이 스무 가지가 되면 경우의 수는 20!, 약 2.4 × 10^18. 240경(京). 컴퓨터가 초당 10억 개를 계산해도 77년이 걸린다. 서른 가지면 인류의 예상 수명 안에 끝나지 않는다.

물론 일일이 모두 따져보지 않고도 최적의 순서를 찾는 작업은 양자 컴퓨터가 할 줄 안다고 한다. 하지만 꼭 양자 컴퓨터가 아니어도, 우리는 매일 아침 무엇인가 순서를 정한다. 대충이나마 순서를 정하고, 일을 치르고, 저녁에 별 탈 없이 집에 돌아온다. 삼백육십만 가지 중 최적을 골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치명적으로 나쁜 순서도 아니다. 우리가 일상을 "잘" 사는 것은, 최적화된 대로 살아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선택이 최적이 아니어도 괜찮은 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최적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충분히 괜찮은 해(good enough solution)"를 허용한다. 진화가 그랬다 — 최적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멸종하지 않을 정도의 전략으로 수십억 년을 버텨왔다.

순서를 정하는 일이 더욱 정교하게 중요해지는 건 여러 산업적, 경제적 환경에서다. 실제로 그런 문제를 연구소에서도 풀고 있다. 그럼, 피아노에서는 어떨까? 

피아노 건반은 88개다. 한 순간에 어떤 건반을 누르고 어떤 건반을 안 누르는가 — 88개 각각이 on 또는 off, 두 가지 상태를 가지므로 가능한 조합은 2^88. 약 3.09 × 10^26. 약 309억 경.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 수가 대략 10^24이니까, 건반 조합의 수가 우주의 별보다 몇 배가 더 많은가? 

물론 실제로는 이 조합 대부분이 무의미하다. 여기서 탐색 공간이 줄어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현대 음악이 기계에게 악보나 지시사항을 인식시키고 연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정말 말 그대로 고전적인, 아날로그적인 경우를 보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은 10개. 엄지가 인접 건반을 동시에 누를 수 있는 경우를 감안해도 한 순간에 누를 수 있는 건반은 최대 12개. 88개 중 0개에서 12개까지를 고르는 경우의 수를 합산하면 약 2.43 × 10^14, 즉 총 243조다. 손가락 제약 하나로 300억 경이 넘는 수가 243조로 줄어든다. 줄었다고는 했지만 243조도 여전히 광활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한 손의 도달 범위. 한 손이 동시에 짚을 수 있는 건반은 대개 한 옥타브에서 한 옥타브 반, 각자의 손 크기에 따라 건반 12~18개 범위 안에 있다. 양손을 합쳐도 실질적으로 선택 가능한 건반은 88개 중 24~36개로 좁혀진다. 이 안에서 10개를 고르면, C(30,10) ≈ 3,000만. 243조가 3,000만으로 떨어졌다. 드디어 사람이 일상에서도 어지간히 체감하는 스케일에 접근한다.

아, 센스 좋은 분들은 직감하시겠지만, 이 스케일은 사실 피아노 건반이, 예를 들어 30개라면 그 이상이기만 하면 똑같이 나오는 답이다. 하지만 왜 88개인지는 간간 언급했으니, 넘어가자.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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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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