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4월 30일, 미국 동부에는 미래가 극명하게 둘로 갈라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뉴욕 만국박람회는 '내일의 세계'를 내걸고 소음의 도가니 속에서 미래를 전시했다—군중의 환호와 선전, 기계음이 한 덩어리로 몰려왔다. 웨스팅하우스의 '일렉트로'는 로봇이라기보다는 자동인형에 가까웠지만, 풍선을 불고 담배를 피우며 '지능'을 연기했다. 제너럴 모터스 전시관의 '퓨처라마'는 거대한 모형 도시 속에서 고속도로망이 대지를 재편하고 교외 생활이 번져 가는 광경을 선사했다. 그날의 유토피아는 즉흥적이고 과장되며 매혹적이어서, 대공황의 상흔마저 달래는 랩소디처럼 들렸다.
4,500만에 가까운 인파가 다녀간 그 잔치 통 한복판엔, 곧 이어질 세기의 후반을 좌지우지한, 그래서 오늘날 모두가 익숙해진 '그 무엇'은 적어도 주연이 아니었다. '내일의 세계'를 선언한 바로 그 자리에서, 정작 다가올 결정적인 내일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무엇' 하나에 숨은 맹위를 몇 달 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각인시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행사장 연단에 섰지만, 잡음과 잔향 탓에 메시지는 대중에게 거의 닿지 않았다. 이 불가사의한 천재는 박람회의 광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원자력과 디지털 컴퓨터. 이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조용한 호기심 속에서 자라났다. 박람회장을 등지고 운전대에 올라 남서쪽으로 한 시간 반 남짓 빠져나가면, 소음은 창밖으로 밀려나고 환호의 잔향도 점점 옅어진다. 프린스턴에 닿을 즈음, 공기부터 달라진다. 아인슈타인 드라이브 1번지로 들어서면, '전시된 미래'가 아니라 '사고하는 미래'가 시작된 자리와 마주한다. 지명에 걸맞게, 아인슈타인의 존재감이 증폭되는 공간이다. 진작에 E=mc²,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를 밝힌 주인공. 화려한 축제를 밝힌 조명과 전기의 마법은, 원자핵이 품은 에너지에 비하면 촛불에 불과했다.
역사 또한 대중의 열광에, 그리고 일렉트로에,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다. 이 철제 '지능'은 녹음된 레코드판에 불과했고, '동작'은 미리 정해진 각본이었다. 쇼가 끝나면 함께 꺼졌고, 결국 고철 덩어리로 전락한 미래였다. 반면, 프린스턴에서는 연출된 지능이 박수받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물질인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근원을 파고드는 질문만이 살아 움직인다.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의 공식이 히로시마의 섬광으로 타오르리라고, 존 폰 노이만의 추상적 계산 문법이 오늘날 데스크톱과 노트북을 거쳐 주머니 속까지 스며들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쇼도 제품도 서비스도 없었다. 칠판과 백묵, 종이와 연필, 그리고 질문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정적이 지배할 뿐. 물론 그 질문이란 '몇 년까지 시장 규모는?', '결과는 몇 년까지 나오는가?' 따위는 아니었다. 묘하게도, 세기와 세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어법은 소란스러운 축제가 아니라 고요한 분필가루를 머금고 태동했다. 엑스포의 소음은 현실을 덮어두는 마취제였지만, 프린스턴의 적막은 문명을 수술하는 메스였다.
적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오히려 소리를 내는 악기, 가령 피아노 앞에서 가장 또렷해지기도 한다. 연주에서 까다롭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지시는 쉼표다. 실제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은 이유야 어쨌든 박자가 자꾸 빨라지는 경향을 보이고는 한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서둘러 다음 건반으로 달아나는 심리적 기제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튼 음악은 소리의 나열로 무너진다. 거꾸로 그 침묵을 끝까지 붙들 줄 아는 손끝에서는, 가장 여린 한 음이 홀 전체를 장악한다. 좋은 연주란 음을 많이 채우는 일이 아니라, 그 음을 받칠 고요를 얼마나 깊이 빚어내느냐의 문제다.
시계가 87년을 건너뛰면,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는 랩소디를 넘어 판타지가 연주된다. 해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CES, 올해는 이 사막의 도시가 온통 'AI'라는 글자로 뒤덮였다. 한마디로 AI 만물상이다. 역시 화려하고 시끄러울뿐더러 더욱 정교하고 더욱 빠르다.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다—이러한 소음이 미래 행세를 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진짜 혁신이라 확신하겠는가? 관객이 보고 싶은 신기를 보여주고, 기업이 팔고 싶은 미래를 포장하고, 언론이 제목을 붙이기 좋은 장면들이 버무려지는 겉치레는 아닌가?
CES는 단지 전시만을 위한 장터가 아니다. 표준과 규제, 거버넌스, 공급망과 플랫폼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술 정치의 무대다. 혁신은 여기서 발표되지만, 동시에 연출된다. '혁신 극장'인 셈이다. 연출은 곧 IR, 자본 배분과 밸류에이션, 리스크의 언어로 번역된다.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는 이 극장에서 일어나기도 걷기도 했다. 하지만, 일렉트로가 지능을 연기했듯, 아틀라스도 자율을 시늉하는 선에 머물지는 않을까. 실체가 무엇이든 질문은 8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다—이런 혁신품들은 매일 작동하는가. 망가지면 누가 책임지는가. 많아지거나 커지면 어디서 막히는가.
GPU 몇 장을 확보했느냐가 'AI력'을 가늠할 잣대인 양 통용된다. 연산 자원은 물론 중요하지만,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양상 속에서는 정작 '왜, 그리고 무엇을'이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나 연산은 도구지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폰 노이만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회고한 논리 설계는, 하드웨어가 아직 제법 거칠던 시절의 제약 때문이자 덕분에 종이와 연필로 '계산이란 무엇인가'를 끝까지 묻는 사유에서 가능했다. 이 역설은 AI 시대일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데이터와 연산을 떠난 순수한 사고가, 데이터와 연산의 다음 여정을 이끈다. 플랫폼 시대를 열어젖힌 웹도, CERN의 입자가속기를 쓰는 대규모 공동 연구의 최전선에서 흩어진 기록과 문서를 더 편하게 주고받으려던 소박한 집착이 낳은 예상치 못한 결실이다. 쓸모없음의 쓸모.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이치다. 쓸모를 묻기 전에 매달린 질문이, 결국 쓸모의 정의를 바꾼다.
막은 내렸지만, 그 사막의 열기도 한층 가신 듯하지만, 질문은 여전하다. 증명의 시간은 이제부터다. 운영과 책임, 확장이라는 고단한 조건을 견뎌낼 진짜 미래는 지금도 어딘가의 고요함 속에서 자라는 중이다. 1939년의 뉴욕이 아니라, 프린스턴에서처럼.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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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4월 30일, 미국 동부에는 미래가 극명하게 둘로 갈라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뉴욕 만국박람회는 '내일의 세계'를 내걸고 소음의 도가니 속에서 미래를 전시했다—군중의 환호와 선전, 기계음이 한 덩어리로 몰려왔다. 웨스팅하우스의 '일렉트로'는 로봇이라기보다는 자동인형에 가까웠지만, 풍선을 불고 담배를 피우며 '지능'을 연기했다. 제너럴 모터스 전시관의 '퓨처라마'는 거대한 모형 도시 속에서 고속도로망이 대지를 재편하고 교외 생활이 번져 가는 광경을 선사했다. 그날의 유토피아는 즉흥적이고 과장되며 매혹적이어서, 대공황의 상흔마저 달래는 랩소디처럼 들렸다.
4,500만에 가까운 인파가 다녀간 그 잔치 통 한복판엔, 곧 이어질 세기의 후반을 좌지우지한, 그래서 오늘날 모두가 익숙해진 '그 무엇'은 적어도 주연이 아니었다. '내일의 세계'를 선언한 바로 그 자리에서, 정작 다가올 결정적인 내일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무엇' 하나에 숨은 맹위를 몇 달 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각인시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행사장 연단에 섰지만, 잡음과 잔향 탓에 메시지는 대중에게 거의 닿지 않았다. 이 불가사의한 천재는 박람회의 광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원자력과 디지털 컴퓨터. 이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조용한 호기심 속에서 자라났다. 박람회장을 등지고 운전대에 올라 남서쪽으로 한 시간 반 남짓 빠져나가면, 소음은 창밖으로 밀려나고 환호의 잔향도 점점 옅어진다. 프린스턴에 닿을 즈음, 공기부터 달라진다. 아인슈타인 드라이브 1번지로 들어서면, '전시된 미래'가 아니라 '사고하는 미래'가 시작된 자리와 마주한다. 지명에 걸맞게, 아인슈타인의 존재감이 증폭되는 공간이다. 진작에 E=mc²,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를 밝힌 주인공. 화려한 축제를 밝힌 조명과 전기의 마법은, 원자핵이 품은 에너지에 비하면 촛불에 불과했다.
역사 또한 대중의 열광에, 그리고 일렉트로에,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다. 이 철제 '지능'은 녹음된 레코드판에 불과했고, '동작'은 미리 정해진 각본이었다. 쇼가 끝나면 함께 꺼졌고, 결국 고철 덩어리로 전락한 미래였다. 반면, 프린스턴에서는 연출된 지능이 박수받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물질인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근원을 파고드는 질문만이 살아 움직인다. 그 누구도 아인슈타인의 공식이 히로시마의 섬광으로 타오르리라고, 존 폰 노이만의 추상적 계산 문법이 오늘날 데스크톱과 노트북을 거쳐 주머니 속까지 스며들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쇼도 제품도 서비스도 없었다. 칠판과 백묵, 종이와 연필, 그리고 질문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정적이 지배할 뿐. 물론 그 질문이란 '몇 년까지 시장 규모는?', '결과는 몇 년까지 나오는가?' 따위는 아니었다. 묘하게도, 세기와 세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어법은 소란스러운 축제가 아니라 고요한 분필가루를 머금고 태동했다. 엑스포의 소음은 현실을 덮어두는 마취제였지만, 프린스턴의 적막은 문명을 수술하는 메스였다.
적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오히려 소리를 내는 악기, 가령 피아노 앞에서 가장 또렷해지기도 한다. 연주에서 까다롭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지시는 쉼표다. 실제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은 이유야 어쨌든 박자가 자꾸 빨라지는 경향을 보이고는 한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서둘러 다음 건반으로 달아나는 심리적 기제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튼 음악은 소리의 나열로 무너진다. 거꾸로 그 침묵을 끝까지 붙들 줄 아는 손끝에서는, 가장 여린 한 음이 홀 전체를 장악한다. 좋은 연주란 음을 많이 채우는 일이 아니라, 그 음을 받칠 고요를 얼마나 깊이 빚어내느냐의 문제다.
시계가 87년을 건너뛰면,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는 랩소디를 넘어 판타지가 연주된다. 해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CES, 올해는 이 사막의 도시가 온통 'AI'라는 글자로 뒤덮였다. 한마디로 AI 만물상이다. 역시 화려하고 시끄러울뿐더러 더욱 정교하고 더욱 빠르다.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다—이러한 소음이 미래 행세를 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진짜 혁신이라 확신하겠는가? 관객이 보고 싶은 신기를 보여주고, 기업이 팔고 싶은 미래를 포장하고, 언론이 제목을 붙이기 좋은 장면들이 버무려지는 겉치레는 아닌가?
CES는 단지 전시만을 위한 장터가 아니다. 표준과 규제, 거버넌스, 공급망과 플랫폼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술 정치의 무대다. 혁신은 여기서 발표되지만, 동시에 연출된다. '혁신 극장'인 셈이다. 연출은 곧 IR, 자본 배분과 밸류에이션, 리스크의 언어로 번역된다.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는 이 극장에서 일어나기도 걷기도 했다. 하지만, 일렉트로가 지능을 연기했듯, 아틀라스도 자율을 시늉하는 선에 머물지는 않을까. 실체가 무엇이든 질문은 8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다—이런 혁신품들은 매일 작동하는가. 망가지면 누가 책임지는가. 많아지거나 커지면 어디서 막히는가.
GPU 몇 장을 확보했느냐가 'AI력'을 가늠할 잣대인 양 통용된다. 연산 자원은 물론 중요하지만,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양상 속에서는 정작 '왜, 그리고 무엇을'이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나 연산은 도구지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폰 노이만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회고한 논리 설계는, 하드웨어가 아직 제법 거칠던 시절의 제약 때문이자 덕분에 종이와 연필로 '계산이란 무엇인가'를 끝까지 묻는 사유에서 가능했다. 이 역설은 AI 시대일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데이터와 연산을 떠난 순수한 사고가, 데이터와 연산의 다음 여정을 이끈다. 플랫폼 시대를 열어젖힌 웹도, CERN의 입자가속기를 쓰는 대규모 공동 연구의 최전선에서 흩어진 기록과 문서를 더 편하게 주고받으려던 소박한 집착이 낳은 예상치 못한 결실이다. 쓸모없음의 쓸모.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이치다. 쓸모를 묻기 전에 매달린 질문이, 결국 쓸모의 정의를 바꾼다.
막은 내렸지만, 그 사막의 열기도 한층 가신 듯하지만, 질문은 여전하다. 증명의 시간은 이제부터다. 운영과 책임, 확장이라는 고단한 조건을 견뎌낼 진짜 미래는 지금도 어딘가의 고요함 속에서 자라는 중이다. 1939년의 뉴욕이 아니라, 프린스턴에서처럼.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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