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니 심지어 AX니 하는 키워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태를 보면, 더더욱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컴맹'이라는 말이 잦아든 까닭은, 이것이 그냥 철 지난 증상어일 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AI를 대하는 생각이나 행동, 발화 대다수에서 느끼는 바는, 이 녀석이 아무리 지능적이거나 사람과 비슷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컴퓨터, 즉 기계라는 가장 단순하고 뻔한 사실을 몰라서 그런가, 하는 점이다. 퇴치되어야 할, 또는 퇴치하자고 하던 컴맹이 충분히 퇴치되지 못했다는 강력한 흔적 중 하나다. 모습을 바꾸고 살아남은 무지다. 더욱이, 그 가운데 가장 교활한 변종은, 하필 가장 새로운 기술의 이름을 달고 우리 시대에 돌아왔다.
컴맹이 아니라 양자컴맹, 조금 줄인다면 그냥 양자맹이라 해야 할까. 여기서 되물을 수는 있겠다. 컴퓨터 그럭저럭 쓰면 컴맹은 아니지 않냐고. 적어도 조작적으로는, 기능적으로는 그러하다. 질문을 바꿔 볼까? 컴퓨터 리터러시란 그럼 무엇일까? 한 마디로 컴퓨터에 대한, 제인 오스틴식으로 표현하자면, 'sense and sensibility'가 아닐까. 컴퓨터와 소통하는 소양, 곧 computational thinking을 체화하는 관문이다. 즉, 이 기계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나아가 무엇이 아닌지까지 추상하고 분해하고 분간하는 자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계가 언젠가 지능의 얼굴을 하고 자랄 수 있다는 '센스'까지가 진작 그 안에 포함된다. 튜링의 보편기계는 애초에 '단 하나의 기계가 임의의 계산을 흉내 낸다'는 개념이었고, 그 보편적 흉내쟁이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이 곧 컴퓨터를 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 관점에선 AI란 돌발 사건이 아니라 그 본성의 만개일 뿐이다. 경계를 아는 자만이 그 안을 안다. 이 경계 감각을 빠뜨린 협의(狹義)의 리터러시만이, AI 앞에서 그제야 "이게 대체 무엇이냐"며 휘청인다.
기계를 기계로 보지 못하는 무지든, 곧 닥칠 무지든, 뿌리는 하나다. 우리는 오래 점(點)을 세는 방식으로 계산, 곧 컴퓨팅을 이해해왔다. 일명 '이산적(discrete)'으로 말이다. 한 비트는 0이거나 1, on이거나 off. 그런 점을 더 많이, 더 빨리 세는 길로 한 시대를 건너왔고, 그래서 더 똑똑한 기계란 으레 '점이 더 많은 기계'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몇 비트야? 이건 컴퓨터가 얼마나 좋으냐를 따지는 궁금증이었다. 그런 인식의 영향이 커서일까 몰라도, AI도 그렇게 오해되고, 양자도 그렇게 오해된다. 그런데 점을 아무리 잘, 빨리 세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무엇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셈이 고전 데이터와 정보의 문법이라면, 양자 정보는 그 문법을 바꾼다. 정보가 점이 아니라 위상과 간섭에, 즉 점들 사이의 관계에 실린다. 비트 앞에 '양자'를 붙인 양자 비트, 즉 quantum bit를 줄여서, qubit(큐비트)라고 하는데, 이는 0과 1이라는 두 상태와 관련되므로 '비트'라는 말이 살아남지만, 결국 그것이 동시에 오해의 진원지가 된다. 수식으로 쓰면 두 상태의 선형 결합으로 깔끔하게 표시된다.
따라서, "큐비트 N개는 2ⁿ개의 상태를 동시에 계산한다."는 수사도 흔해진 듯하다. 이 문장을 처음 들으면 무언가를 깨달은 기분이 든다. 충만하고, 완결돼 있고, 우주의 비밀에 한 뼘 다가선 듯한. 그러나 양자 컴퓨터의 빠름은 '동시에 계산함'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간섭에서 온다 — 원하는 답의 확률 진폭을 키우고 나머지를 상쇄시키는, 파동과 파동 사이에 일어나는 일. 측정은 그 중첩을 단 하나로 무너뜨리고(보른 규칙), n개의 큐비트에서 끝내 끌어낼 수 있는 고전 정보는 역시 n비트를 넘을 수 없다(홀레보 한계). 힐베르트 공간에 담긴 것과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마치 악보에 담긴 점, 곧 음표를 모두 잘 센다고 해서 바로 음악이 되지 않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피아노 앞에서 가장 맹해지는 순간은 음표를 하나도 틀리지 않았는데 음악이 없을 때다. 손가락은 정확히 제자리를 짚고, 박은 어김없고, 셈여림 기호마저 다 지켰는데, 그 공간에는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는다. 악보는, 점들은 빠짐없이 '읽혔'다. 그러나 음악은 읽히지 않았다. 흔히 기교는 흠잡을 데 없다고들 한다. 정작 빠진 것은 음표와 음표 사이, 한 프레이즈가 다음 프레이즈를 부르는 그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으로서의 간섭이다. 악보 위의 검은 점들은 저장된 것일 뿐, 음악은 그 점들 사이에서 연주자가 꺼내는 것이다. 저장과 인출은 다르다. '점'을 다 짚고도 음악맹(盲)일 수 있다.
# 리터러시 없는 리터러시 1편 보기 🔗
- 계속 -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자와피아노
+ 과학자와 피아노 연재 목록 보기
AI니 심지어 AX니 하는 키워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태를 보면, 더더욱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컴맹'이라는 말이 잦아든 까닭은, 이것이 그냥 철 지난 증상어일 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AI를 대하는 생각이나 행동, 발화 대다수에서 느끼는 바는, 이 녀석이 아무리 지능적이거나 사람과 비슷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컴퓨터, 즉 기계라는 가장 단순하고 뻔한 사실을 몰라서 그런가, 하는 점이다. 퇴치되어야 할, 또는 퇴치하자고 하던 컴맹이 충분히 퇴치되지 못했다는 강력한 흔적 중 하나다. 모습을 바꾸고 살아남은 무지다. 더욱이, 그 가운데 가장 교활한 변종은, 하필 가장 새로운 기술의 이름을 달고 우리 시대에 돌아왔다.
컴맹이 아니라 양자컴맹, 조금 줄인다면 그냥 양자맹이라 해야 할까. 여기서 되물을 수는 있겠다. 컴퓨터 그럭저럭 쓰면 컴맹은 아니지 않냐고. 적어도 조작적으로는, 기능적으로는 그러하다. 질문을 바꿔 볼까? 컴퓨터 리터러시란 그럼 무엇일까? 한 마디로 컴퓨터에 대한, 제인 오스틴식으로 표현하자면, 'sense and sensibility'가 아닐까. 컴퓨터와 소통하는 소양, 곧 computational thinking을 체화하는 관문이다. 즉, 이 기계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나아가 무엇이 아닌지까지 추상하고 분해하고 분간하는 자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계가 언젠가 지능의 얼굴을 하고 자랄 수 있다는 '센스'까지가 진작 그 안에 포함된다. 튜링의 보편기계는 애초에 '단 하나의 기계가 임의의 계산을 흉내 낸다'는 개념이었고, 그 보편적 흉내쟁이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이 곧 컴퓨터를 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 관점에선 AI란 돌발 사건이 아니라 그 본성의 만개일 뿐이다. 경계를 아는 자만이 그 안을 안다. 이 경계 감각을 빠뜨린 협의(狹義)의 리터러시만이, AI 앞에서 그제야 "이게 대체 무엇이냐"며 휘청인다.
기계를 기계로 보지 못하는 무지든, 곧 닥칠 무지든, 뿌리는 하나다. 우리는 오래 점(點)을 세는 방식으로 계산, 곧 컴퓨팅을 이해해왔다. 일명 '이산적(discrete)'으로 말이다. 한 비트는 0이거나 1, on이거나 off. 그런 점을 더 많이, 더 빨리 세는 길로 한 시대를 건너왔고, 그래서 더 똑똑한 기계란 으레 '점이 더 많은 기계'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몇 비트야? 이건 컴퓨터가 얼마나 좋으냐를 따지는 궁금증이었다. 그런 인식의 영향이 커서일까 몰라도, AI도 그렇게 오해되고, 양자도 그렇게 오해된다. 그런데 점을 아무리 잘, 빨리 세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무엇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셈이 고전 데이터와 정보의 문법이라면, 양자 정보는 그 문법을 바꾼다. 정보가 점이 아니라 위상과 간섭에, 즉 점들 사이의 관계에 실린다. 비트 앞에 '양자'를 붙인 양자 비트, 즉 quantum bit를 줄여서, qubit(큐비트)라고 하는데, 이는 0과 1이라는 두 상태와 관련되므로 '비트'라는 말이 살아남지만, 결국 그것이 동시에 오해의 진원지가 된다. 수식으로 쓰면 두 상태의 선형 결합으로 깔끔하게 표시된다.
따라서, "큐비트 N개는 2ⁿ개의 상태를 동시에 계산한다."는 수사도 흔해진 듯하다. 이 문장을 처음 들으면 무언가를 깨달은 기분이 든다. 충만하고, 완결돼 있고, 우주의 비밀에 한 뼘 다가선 듯한. 그러나 양자 컴퓨터의 빠름은 '동시에 계산함'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간섭에서 온다 — 원하는 답의 확률 진폭을 키우고 나머지를 상쇄시키는, 파동과 파동 사이에 일어나는 일. 측정은 그 중첩을 단 하나로 무너뜨리고(보른 규칙), n개의 큐비트에서 끝내 끌어낼 수 있는 고전 정보는 역시 n비트를 넘을 수 없다(홀레보 한계). 힐베르트 공간에 담긴 것과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마치 악보에 담긴 점, 곧 음표를 모두 잘 센다고 해서 바로 음악이 되지 않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피아노 앞에서 가장 맹해지는 순간은 음표를 하나도 틀리지 않았는데 음악이 없을 때다. 손가락은 정확히 제자리를 짚고, 박은 어김없고, 셈여림 기호마저 다 지켰는데, 그 공간에는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는다. 악보는, 점들은 빠짐없이 '읽혔'다. 그러나 음악은 읽히지 않았다. 흔히 기교는 흠잡을 데 없다고들 한다. 정작 빠진 것은 음표와 음표 사이, 한 프레이즈가 다음 프레이즈를 부르는 그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으로서의 간섭이다. 악보 위의 검은 점들은 저장된 것일 뿐, 음악은 그 점들 사이에서 연주자가 꺼내는 것이다. 저장과 인출은 다르다. '점'을 다 짚고도 음악맹(盲)일 수 있다.
# 리터러시 없는 리터러시 1편 보기 🔗
- 계속 -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자와피아노
+ 과학자와 피아노 연재 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