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 앞에 앉아 같은 마디를 몇 번이고 되짚다 보면, 어느 순간 당연한 듯하면서도 신묘한 사실 하나와 마주친다. 내가 내 소리를 듣지 못하면, 청자 누구도, 음반에서든, 무대를 마주한 객석에서든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엄연함. 물리적으로야 음파는 똑같이 공기를 타고 날아간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리고, 현은 정직하게 진동한다. 그러나 연주자가 자기 소리 안에서 무언가를 듣지 못한 채 친 음은, 객석에 도착할 때 그 '못 들음'까지 함께 싣고 간다. 물리적으로 아무리 크게 울려도 말이다.
피아노는 이 점에서 다른 악기와 기발하게 다르다. 현악기는 진동이 몸을 타고 직접 올라온다. 활을 쥔 팔로, 턱에 받친 악기의 떨림으로, 연주자는 소리가 태어나는 순간과 거의 하나가 된다. 관악기는 호흡으로 음과 묶여 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자는 자기 소리와 한 발 떨어져 있다. 건반을 누르는 행위와 현이 우는 사건 사이에는 해머라는 매개가 끼어 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자기가 만든 소리를 늘 바깥에서 들어야 한다. 객석에서 들릴 소리를 미리 머릿속에 그려두고, 그 그림에 손을 맞추는 일 — 그것이 피아노를 친다는 행위의, 적어도 절반이다.
이 안쪽의 그림이 흐려지면, 손가락은 여전히 정확한 자리를 누르는데도 음악은 사라진다. 음향만 남고 의미가 빠져나간다. 연주자의 귀가 비어 있으면, 객석의 귀도 비어 버린다. 특히 여린 소리에서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피아니시모는 작게만 치는 일이 아니다. 작게 '들리도록'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손끝이 건반 바닥에 닿기까지의 그 짧은 거리에서, 연주자는 이미 그 음이 객석 뒤쪽 벽에 가 닿는 모습을 듣고 있어야 한다. 그 들음 없이 손가락만 살살 움직이면, 소리는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약해진다. 약한 소리와 여린 소리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힘이 빠진 경우, 후자는 멀리까지 닿도록 정교하게 깎인 경우다. 그 차이를 객석은 정확히 느낀다. 설령 설명하지는 못해도.
마찬가지로 연주자가 어딘가 어색함을 느끼며 친 음은, 그 어색함을 고스란히 객석에 전한다. 청중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짚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틀린 것도, 박자가 어긋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언가 미세하게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연주자의 몸 안에서 시작되어 음을 타고 객석까지 새어 나온 결과다. 음악에서 거짓말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연주자가 자기를 속이지 못하면 청중도 속이지 못하고, 연주자가 자기를 속이는 순간 그 속임수까지 청중에게 전달된다. 들리지 않는 진심은 없고, 새어 나가지 않는 거짓도 없다.
간간 '~ 방정식' 같은 제목으로 나오는 책을 접하다 보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제목만 보면 아무런 이상함이 없는데, 목차나 안을 훑어 보는 순간, 제목이, 저자의 의중이 의심스러워지고는 한다. 방정식이 아닌 식이 같은 이름의 범주로 들어간다. 피타고라스의 그것은 정리이지 방정식이 아니다. 즉 세 변의 길이 관계를 기술하는 보편 명제지, 풀어야 할 미지수가 담긴 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함에도, '피타고라스의 방정식'이라고 해도 그냥 그런 게 있었지 하고 익숙한 듯 넘어갈 지경이다. 이런 의구심은 그런 책의 다른 장점의 가치마저 끌어내린다.
피타고라스 '방정식'은 알기 쉬운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수학 및 과학의 역사에서 꼭 방정식이 아니어도 중요하거나 아름다운 식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어색하다고 느끼는 감각을 상실했을까? 그런 무감각은, 그 표현을 접하는 이에게 고스란히 건너간다. 다수는 어디가 틀렸는지 짚지 못하더라도 희미하고도 엄연히 존재하는 불편함을 감수한다. 연주자가 듣지 못한 음이 객석에 빈 채로 도착하듯, 쓰는 이가 느끼지 못한 어긋남은 읽는 이에게 어긋남 그대로 도착한다. 정확함이란 결국, 만드는 사람이 먼저 자기 귀로 어긋남을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반세기 가까이 피아노 앞에 앉아 지낸 동안, 나의 소리를 듣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거듭해서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들리기 시작하면 눈도, 귀도 하나가 더 달린 양, 차원이 다른 느낌에 빠진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청중의 눈, 청중의 귀 아닐까. 내가 듣지 못하면 남도 듣지 못하기에, 어렵지만 돌파해야 하는 관문이다. 음에서도,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엇을 만들든, 먼저 자기 귀를 의심할 일이다. 가장 두려운 연주자는 틀린 음을 치는 자가 아니라, 틀린 줄도 모른 채 태평한 자다.
글도, 언어도 다르지 않다. 하물며, AI가 구사하는 말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이젠 AI조차 '피타고라스의 방정식'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 아니 오류는 안 저지르는 시대로 가고 있지만.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자와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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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앞에 앉아 같은 마디를 몇 번이고 되짚다 보면, 어느 순간 당연한 듯하면서도 신묘한 사실 하나와 마주친다. 내가 내 소리를 듣지 못하면, 청자 누구도, 음반에서든, 무대를 마주한 객석에서든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엄연함. 물리적으로야 음파는 똑같이 공기를 타고 날아간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리고, 현은 정직하게 진동한다. 그러나 연주자가 자기 소리 안에서 무언가를 듣지 못한 채 친 음은, 객석에 도착할 때 그 '못 들음'까지 함께 싣고 간다. 물리적으로 아무리 크게 울려도 말이다.
피아노는 이 점에서 다른 악기와 기발하게 다르다. 현악기는 진동이 몸을 타고 직접 올라온다. 활을 쥔 팔로, 턱에 받친 악기의 떨림으로, 연주자는 소리가 태어나는 순간과 거의 하나가 된다. 관악기는 호흡으로 음과 묶여 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자는 자기 소리와 한 발 떨어져 있다. 건반을 누르는 행위와 현이 우는 사건 사이에는 해머라는 매개가 끼어 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자기가 만든 소리를 늘 바깥에서 들어야 한다. 객석에서 들릴 소리를 미리 머릿속에 그려두고, 그 그림에 손을 맞추는 일 — 그것이 피아노를 친다는 행위의, 적어도 절반이다.
이 안쪽의 그림이 흐려지면, 손가락은 여전히 정확한 자리를 누르는데도 음악은 사라진다. 음향만 남고 의미가 빠져나간다. 연주자의 귀가 비어 있으면, 객석의 귀도 비어 버린다. 특히 여린 소리에서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피아니시모는 작게만 치는 일이 아니다. 작게 '들리도록'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손끝이 건반 바닥에 닿기까지의 그 짧은 거리에서, 연주자는 이미 그 음이 객석 뒤쪽 벽에 가 닿는 모습을 듣고 있어야 한다. 그 들음 없이 손가락만 살살 움직이면, 소리는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약해진다. 약한 소리와 여린 소리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힘이 빠진 경우, 후자는 멀리까지 닿도록 정교하게 깎인 경우다. 그 차이를 객석은 정확히 느낀다. 설령 설명하지는 못해도.
마찬가지로 연주자가 어딘가 어색함을 느끼며 친 음은, 그 어색함을 고스란히 객석에 전한다. 청중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짚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틀린 것도, 박자가 어긋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언가 미세하게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연주자의 몸 안에서 시작되어 음을 타고 객석까지 새어 나온 결과다. 음악에서 거짓말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연주자가 자기를 속이지 못하면 청중도 속이지 못하고, 연주자가 자기를 속이는 순간 그 속임수까지 청중에게 전달된다. 들리지 않는 진심은 없고, 새어 나가지 않는 거짓도 없다.
간간 '~ 방정식' 같은 제목으로 나오는 책을 접하다 보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제목만 보면 아무런 이상함이 없는데, 목차나 안을 훑어 보는 순간, 제목이, 저자의 의중이 의심스러워지고는 한다. 방정식이 아닌 식이 같은 이름의 범주로 들어간다. 피타고라스의 그것은 정리이지 방정식이 아니다. 즉 세 변의 길이 관계를 기술하는 보편 명제지, 풀어야 할 미지수가 담긴 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함에도, '피타고라스의 방정식'이라고 해도 그냥 그런 게 있었지 하고 익숙한 듯 넘어갈 지경이다. 이런 의구심은 그런 책의 다른 장점의 가치마저 끌어내린다.
피타고라스 '방정식'은 알기 쉬운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수학 및 과학의 역사에서 꼭 방정식이 아니어도 중요하거나 아름다운 식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어색하다고 느끼는 감각을 상실했을까? 그런 무감각은, 그 표현을 접하는 이에게 고스란히 건너간다. 다수는 어디가 틀렸는지 짚지 못하더라도 희미하고도 엄연히 존재하는 불편함을 감수한다. 연주자가 듣지 못한 음이 객석에 빈 채로 도착하듯, 쓰는 이가 느끼지 못한 어긋남은 읽는 이에게 어긋남 그대로 도착한다. 정확함이란 결국, 만드는 사람이 먼저 자기 귀로 어긋남을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반세기 가까이 피아노 앞에 앉아 지낸 동안, 나의 소리를 듣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거듭해서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들리기 시작하면 눈도, 귀도 하나가 더 달린 양, 차원이 다른 느낌에 빠진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청중의 눈, 청중의 귀 아닐까. 내가 듣지 못하면 남도 듣지 못하기에, 어렵지만 돌파해야 하는 관문이다. 음에서도,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엇을 만들든, 먼저 자기 귀를 의심할 일이다. 가장 두려운 연주자는 틀린 음을 치는 자가 아니라, 틀린 줄도 모른 채 태평한 자다.
글도, 언어도 다르지 않다. 하물며, AI가 구사하는 말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이젠 AI조차 '피타고라스의 방정식'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 아니 오류는 안 저지르는 시대로 가고 있지만.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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