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과학자와 피아노 #67.『호킹 주식회사』를 읽기 전에 ③ - 말을 걸지 못한 사람

블랙소스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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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Part III (케임브리지의 DAMTP를 비롯한 수학부 내 석사과정에 해당) 학생이, 내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저 복잡한 과정을 가동시켜도 되는 것일까. 


그것이 티타임마다 했던 생각이다. 내가 한마디를 던지면 호킹은 대답하기 위해 화면에서 커서를 움직여야 했다. 대단한 질문을 할 것도 아니면서 몇 마디 경험을 위해 저 '네트워크'에서 그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존경심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소심함이었다. 상대의 시간을 미리 계산하고, 그 계산에서 내가 별로 가치를 더할 리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비슷한 짓을 훨씬 뒤에도 했다. 


한 편도 안 빼고 읽으신 분들은 어쩌면 눈치를 채실 수도 있겠다. 2015년 10월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때였다. 결선을 하루 앞두고 연습하던 조성진을 스타인웨이 스튜디오 겸 매장에서 바로 마주쳤다. 그런데 또 말을 걸지 못했다. 다음날이면 이 큰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피아노 대회의 파이널 무대 연주를 해야 할 사람이 얼마나 예민하고 긴장해 있을까를 나는 먼저 걱정했다. 괜히 말을 붙여 리듬을 깨뜨리는 것보다 조용히 지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다. 


물론 호킹과 조성진의 경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내 쪽에서 돌아간 회로는 놀랄 만큼 똑같았다. 상대가 소진할 물리적, 심리적 비용을 내가 먼저 계산하고, 거기에 비해 내 행동이 시시하다고 판정한 뒤, 입을 다무는 것이다.


지나고 봤을 때, 두 경우 다 나중에는 조금 우스워졌다.


호킹의 시스템에는 자주 쓰는 단어와 문장을 미리 넣어둘 수 있었다. 삼천 개쯤 되는 어휘가 통째로 들어 있어서 흔한 표현은 골라 쓰면 됐고,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쓰던 시절에는 분당 열몇 단어까지 나왔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모든 대화를 매번 글자 하나씩 맨바닥에서 쌓아 올려야 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강연문은 아예 며칠 전에 써두고 재생했다. 


게다가 호킹은 상황에 따라 쓸 문장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시간의 역사』를 잘 읽었다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 돌려줄 답이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고맙습니다, 그런데 읽으셨습니까'였다고 한다. 함께 책을 쓴 레너드 믈로디노프가 회고록에 적어둔 이야기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건네는 인사 정도는 미리 대비해 둔 종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것도 자기 신화를 슬쩍 찌르는 쪽으로.


조성진도 마찬가지다. 그날 연습하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들었다면 알았을 것이다. 다음날 결선에서 그 정도 연주를 내놓을 사람의 소리는 이미 믿기 어려울 만큼 탄탄했다. 지나가던 한국 사람이 응원 한마디 건넨다고 흔들릴 멘탈이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몇 주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온 결과인데, 이 연주자를 시험 전날의 초치기라도 하는 수험생처럼 취급한 셈이다. 


무엇보다, 그 값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매일 치르고 있었다. 티타임마다 휠체어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커서가 움직이는 몇 분을 그냥 견디고 있었다. 그들이 특별히 인내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방에서 대화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계산서를 혼자 들여다보고 물러선 것은 나뿐이었다.


결국 배려가 많은 캐릭터라기보다, 그저 타인의 취약성을 당사자보다 먼저 상상하는 쪽이었는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함이었다. 덕분에 나는 호킹에게도, 쇼팽 콩쿠르 우승 전날의 조성진에게도 한마디를 못 건넨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래도 느리기는 느리다. 분당 열몇 단어면 한 문단을 만드는 데 5분이나 10분이 걸린다는 계산은 맞다. 2000년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기사에도 질문 하나에 답하는 데 5분에서 10분이 걸린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 내 산수가 아주 틀렸던 것은 아니다. 틀린 것은 그 시간을 무엇으로 봤느냐였다.


아마 호킹 교수의 시간을 아낀 것이 아니라 신화의 자리에서 말을 걸지 않음으로써 미알레가 해체하려는 바로 그 이미지를, 몸 없이 사유하는 정신이라는 이미지를 혼자 조용히 재생산하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 그 관과 천을 보고도 그랬다.

묘하게도 『시간의 역사』 자체가 이 이야기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호킹은 공항 서점에서도 팔리는 물리학 책을 만들고 싶어 했고, 방정식 하나를 넣을 때마다 판매량이 절반씩 줄 거라는 편집자 말을 들었다며 결국 아인슈타인의 (E=mc^2) 하나만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면서 가능한 한 덜 말하는 쪽을 택한 책이었다.

타고난 목소리를 이미 잃은 뒤였고, 초고는 편집자의 요구에 따라 몇 번이나 다시 쓰였으며, 완성된 문장은 컴퓨터 속에서 다시 목소리를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여러 사람과 기계를 거친 결과물이 누구의 것인지 묻는 사람은 없다. 『시간의 역사』의 문장은 단연 호킹의 것이고, 그 미국식 억양의 합성음도 결국 세상 누구보다 호킹의 목소리가 되었다. 본인도 그렇게 여겼다. 더 나은 합성기가 나와도 바꾸지 않은 까닭을 두고 이제는 그 목소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으니까. 바꾸면 아내가 자기를 못 알아볼 거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어쩌면 ‘나의 것’이라는 말은 혼자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수많은 경로를 지나도 끝내 그 사람에게로 수렴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DAMTP 시절 컴퓨터와 휠체어, 느린 커서가 호킹과 나 사이에 놓인 장애물처럼 보였나 보다. 『호킹 주식회사』는 아마 그 시선부터 뒤집으려는 책일 법하다는 무의식이라도 작동한 것일까? 대충은 무슨 책인지 얼른 겉으로 훑고 골랐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 안 되는 선택의 이유도 더 크게 존재했으니까.

그것들은 호킹에게 이르는 길을 막고 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호킹이 우리에게 오는 길이었다. 그 길 바로 옆에 일 년 가까이 서 있으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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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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