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아직 오지 않은 답을 기다리며

전은지
2026-09-02
조회수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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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유난히 마음을 빼앗겼던 연극이 하나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이다. 처음 그 연극을 보았을 때 필자는 당황했다. 무대에는 두 남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이야기하고, 다투고, 떠날까 고민하다가 다시 기다린다. 그런데 연극이 끝날 때까지 정작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도가 누구인지, 왜 그토록 기다리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필자는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고도가 누구란 말인가. 왜 이 사람들은 오지도 않는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가.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극을 다시 보았다. 희곡도 찾아 읽었다. 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새 희미해졌고, 대신 그 연극이 남긴 장면들이 다른 방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내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과 닮아 있지 않은가.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학생일 때는 졸업을 기다리고, 직장을 구할 때는 합격 소식을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어떤 사람은 성공을, 또 어떤 사람은 삶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린다. 그것만 오면 지금의 불완전한 시간이 끝나고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이 시작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지금을 견뎌야 할 시간으로 여기고, 기다리던 것이 도착한 뒤의 삶을 진짜 삶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기다리던 것이 도착하면 기쁨은 생각보다 짧고, 우리는 금세 다음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어떤 고도는 늦게 오고, 어떤 고도는 막상 와보니 내가 기다렸던 것과 다르다. 그리고 어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과학, 불확실함 견뎌내는 기다림의 시간


과학자는 참 많은 것을 기다린다. 실험의 결과를 기다리고, 때로는 며칠씩 이어지는 긴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긴 기다림이 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답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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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김기명>


필자가 연구하는 희박기체역학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수많은 분자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그 속에서 물리현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들여다본다. 분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제각각이지만,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일정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을 바탕으로 기체의 거동을 이해하고, 거기에 담긴 물리적 원리를 찾아간다.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 수많은 조건을 바꾸어가며 같은 계산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렇게 쌓인 결과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관계를 찾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했던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세웠던 가설이 무너지기도 하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결과가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학은 흔히 확실한 답을 주는 학문처럼 보이지만, 과학을 하는 사람의 일상은 오히려 불확실함에 가깝다. 이미 알려진 답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연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가설이 맞는지, 지금 가는 방향이 옳은지, 이 연구의 끝에서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채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다음 날 다시 연구실로 간다. 계산 조건을 바꾸고, 실험을 다시 하고, 질문을 고쳐 쓴다.


과학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답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답을 향해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연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논문이 출판되는 순간보다 그것을 연구하고 쓰던 시간이 훨씬 길고, 하나의 답을 얻는 순간보다 그 답을 찾아 헤매던 시간이 훨씬 길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던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렇다면 고도가 도착해야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으로 취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 그 자체가 기다림일 수도


20대의 필자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무대 위에 멈춰 선 시간 속에 함께 갇힌 듯했다. 고도가 나타나야 이 이상한 이야기가 끝나고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어떤 고도는 오고, 어떤 고도는 아주 늦게 오며, 어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고도가 도착하면 우리는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고도가 누구였는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한다. 어쩌면 기다림은 삶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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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지 (카이스트 교수 항공우주공학)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사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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