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지구상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발명품 ‘리그닌’

김홍표
2026-09-16
조회수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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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는 쌀 같은 식물이나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100년이 걸린다’는 대나무 모두 풀(grass)이다. 속이 비고 마디가 있으며 땅속을 기는 뿌리줄기에서 불거져 나와 해마다 하루 최대 1m까지 자라는 죽순을 앞세워 세를 불리는 대나무는 껍질도 없고 매년 둥치가 굵어지지도 않는다. 자라는 방식이 풀과 비슷해 풀로 분류되지만 대나무는 쌀과 달리 오래 산다. 노래 가사처럼 거의 100년 만에 딱 한번 꽃을 피우고 일제히 목숨을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무 못지않게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뿌리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관다발에 리그닌(lignin)이라는 화합물을 보강해 튼튼한 건축물을 세웠기 때문이다. 2010년 퍼듀대학 클린트 채플은 세포벽에 리그닌을 건축자재로 도입한 관다발식물이 등장하면서 식물이 육상생태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논문을 ‘새 식물학자’에 실었다. 그러므로 뭍에 도달한 최초의 식물은 작은 몸집에 기신기신 살아가는 허약한 생명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막 물을 떠난 식물이 마주한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바닷속 바위에 뿌리를 의탁한 다시마를 떠올려보면 대충 그 상황이 짐작된다. 우선 내리쬐는 강한 자외선을 막던 물 보호막이 사라지고 부력에도 의존할 수 없다. 공기 중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식물은 도리없이 땅바닥을 기어야만 했다. 쉽게 증발하는 물을 지켜야 했고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초식동물과 미생물도 무시하긴 어려웠다.


육상생명체 먹고 살 식량혁명 이끌어


리그닌 발명으로 초기 식물은 자신이 봉착한 여러 난관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리그닌은 초기 관다발식물을 곧추세웠다. 직립 식물은 물을 멀리까지 배달하는 수송 세포를 잡도리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결합구조를 지닌 덕분에 리그닌은 초식동물이나 세균이 분해하기 가장 어려운 생체 고분자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리그닌은 지구 역사상 가장 생산성 높은 발명품이 되었다. 대기권까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한 최초의 생명체이자 행성의 바깥에서 오는 에너지원을 포획함으로써 이미 있던 생명체는 물론 이후 등장할 모든 육상생명체가 먹고 살 수 있도록 1차 생산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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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김기명>


그뿐만이 아니다. 리그닌을 합성하려면 꼭 산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식물이 크기를 키우고 번성했다고 해서 대기의 산소량이 줄어드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로 저장한 식물이 리그닌 덕분에 분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소를 써서 나무를 분해하고 탄수화물을 이산화탄소로 되돌리는 세균의 범지구적 소화작용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덕분이다.


그렇게 리그닌은 지구 대기에 산소의 양을 늘려 대형동물의 출현을 이끌었다. 인간도 그중 하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저간의 사정을 보면 초기 식물은 매년 근사(勤仕)를 모아 몸집을 키웠고 동시에 광합성이 벌어지는 잎의 표면적을 넓혀나갔다. 나중에는 꽃을 발명했고 자손을 씨앗의 형태로 (씨)방에 고이 모셨다. 이런 기나긴 시간을 고려하면 식물은 한동안 ‘여러해살이’ 생명체여야만 했다. 쌀이나 채송화 같은 한해살이풀은 상대적으로 늦게 등장했다는 뜻이다. 씨앗에서 씨앗으로 이어지는 생활사가 1년 안에 마무리되는 생활방식은 발아하고 성숙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한 해를 넘지 않는다.


한해살이풀이라도 자신의 형질을 바꿔 쉽게 여러해살이 식물로 전환할 수 있다. 주변에서 그런 현상을 보기 쉽지 않지만 애기장대라는 모델 식물에서 두어 가지 개화 나 노화 유전자를 손보면 이 식물도 지상부가 말라 죽었다 이듬해 봄이 오면 그 위에 새로운 줄기가 자라났다.


인류를 농경시대로 이끈 한해살이풀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 이후로 우리는 농지를 늘려가며 한해살이풀을 광범위하게 키웠지만 사실 한해살이풀은 전체 속씨식물군의 6%, 초본식물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학자들은 100가지가 넘는 식물과(科)에서 한해살이의 특성이 수천 번 진화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공교롭게도 한해살이풀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를 농경의 시대로 이끌었다. 곡물이 주렁주렁 씨앗을 맺는 한해살이풀의 특성을 우리는 증폭시켰다. 지금 한해살이 식물은 경작지의 약 70%를 차지하며 전세계 식량 소비량의 약 80%를 공급한다.


그러나 한해를 살든 여러 해를 살든 식물 대부분은 세포벽에 리그닌을 장착하고 몸집을 굳건히 세운다. 사소한 변주는 허용한다 해도 중요한 것은 쉽사리 변치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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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기사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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