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론으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살펴보자. 먼저 'dense'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당연히 density가 high하다는 표현이라고 일착으로 의미가 다가왔다. 그렇게 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자, 그럼 어떤 장면에서 나온 문장인지부터 보자.
때는 트리니티 원자폭탄 실험 직전, 7월의 새벽이다. 이 상황을 묘사하는 가운데 등장한 이 문장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미국 남서부 사막 지대의 새벽, 사실 여기서부터 좀 헤매게 되는 시점이다. 고산 지대 공기 밀도가 높나? 오히려 희박하지 않나? 그러니까, 공기 밀도가 높다는 표현이 dense하다는 말만 봐서는 이상하지 않을지 몰라도, '무대' 배경을 고려하면 개념이 어긋난다. 게다가 전후 문장의 흐름 가운데 들어간 'a moist lightning storm'이 실마리 역할도 한다. 돌아보고 나서 하는 소리지만, collocation에 조금만 익숙해도 이런 일착의 착각은 바로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엔 불필요한 논리적 늪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한 가지 궁리라고는 이러했던 기억이 난다. "air"를 분위기 정도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곧, 바로 앞에서 원자폭탄이 터질 터라, 그로 인한 긴장감이 빽빽하게, 말 그대로 'dense'(!)하게 감도는 현장을 전하려는 의도로 다가왔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오죽 갑갑할까? 문맥의 느낌도 그편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는 했다. 아마 숨을 제대로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쉬기 어려웠을 만큼 긴박한 장면으로 비쳤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숨이 막혔다.'라고 짧은 호흡으로,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지나감으로써 그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던 의미를 지닌 셈일까?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다가 결국 역어가 확정된다. 혹시 모를 오역을 피하기 위해서도 제법 고민이 따른다. 하지만 문제가 정말 없을까?
돌아보면, 번역이란, 개념적 정합성을 위배해서도 안 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결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일이다. "dense"는 뿌연 시야, 시각적 흐림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안개나 공기가 자욱한 광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오역보다는 의역에 가깝게 굳이 시도한다면, 공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는 정도로 표현하면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냥 straightforward하게 옮기고 나머지 여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라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개정판 계획은 따로 없던 터라 점점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 (가장 먼저 고치고 싶은 문장이라고 했지만, 고치고 싶은 유일한 문장이기도 했다. 그만큼 100% 완벽히 하려 최대한 애쓴 역작이기도 하다(그 단순한 오탈자마저 하나도 안 남기려는 100%에는 본의 아니게 실패했지만, six sigma 정도는 충족한 듯하다! ^^).
그러다가, 원작이 워낙 출중하므로, 눈독을 들이던 타 출판사에서 타 공역자를 통해 한국어판을 오랜만에 출간했다. 실은 필자에게도 재번역 의사 문의가 있었으나,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흐지부지되고 10년 이상이 흐른 뒤, 원작의 관점에서 재출간이지만, 한국어판의 관점에서는 그냥 다른 책으로 독자를 기다리게 되었다. 서점 매대에 깔린 책을 집어 들자마자, 당연히 이 부분부터, 그리고 역자 소개란을 확인했다.
잠깐, 역자 배경 이야기를 짚어보고 가자. 해당서를 번역하는 내내, 주인공이 미국인인 만큼, 물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배경 속에서 선명한 미국적 감을 잡아야 하는 장면이 자꾸 나오는데, 어떤 때는 미국으로 직접 취재라도 갔으면 하는 생각도 제법 들었다. 당시에는 미국을 한 번이라도 가기 전이었던 반면, 후속으로 나온 한국어판의 역자는 미국을 경험한 배경이 있어서, 여러 면에서 필자보다는 유리하고 번역 전체도 더 나으리라 생각했고, 더군다나 공역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평가는 여전히 시기상조라 보류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특정한 문제의 문장으로 이슈를 좁혀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사실 오역이거나 적어도 과역(over-translation)으로 남은 표현과 거의 비슷한 문장을, 전혀 관여하지 않은 신간에서 다시 만났으니, 참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단 한 글자만 다른 이 번역은 그 표현 자체가 더 극적이었으므로, 현장의 분위기를 심하게 왜곡한 오역의 범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우연인지 표절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묘한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이상한 일이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의 아이러니가 슬쩍 머리를 내민다. 정답은 없고, 해석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오역은 경계가 어딘지 몰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역자는 추론이나 추정 위에서 작업하기 일쑤지만, 그 추정이 작가의 진의를 배반하지 않도록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대로는 작가마저도 침묵한다. 나아가 그 긴장은 때때로, 역자 스스로 자신을 갉아먹는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그림자 속에 머물 줄 아는 불안, 그것은 역자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민의 정점에서도 전혀 가시지 않는 의구심에, 다행히(?) 살아 있는 저자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몇 차례 보낸 문의 가운데서 유일하게 답이 없는 부분이었다. 너무 trivial한 문의라 여겨서였을까? 저자는 유려하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문체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원작은 퓰리처상 후보작이기도 했다(사실, 그래서 한국어로 그럴 만한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는 역자가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필자는 출판사를 꽤 오래도록 피해 다녔다.). 저자의 무응답과 문체를 고려하면, 적어도 신 한국판의 번역은 필자의 선택보다도 무리였다. 그냥 간명하게 장면을 묘사하면서 역사적 순간의 무게감과 긴장감을 간접적으로 내포한 대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오역은 누구든지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역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대로 또는 비슷하게 반복된다면, 의도적이라면 개인적, 또는 우연이라면 구조적 문제라 보인다. 비단 필자의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아마도 여러 차례 다른 역자의 손을 거친, 일명 '세계적인' 문학 작품의 번역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역자의 개인 윤리 의식 문제지만, 한편으론 사람이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부분 표절을 방지할 제도적 보호 장치 또한 적절히 강화되어야 할 터다. 표절이냐 공명이냐, 종잇장, 아니 정말 나노 스케일의 차이 아닐까?
PS: 해당 문장이 포함된 문단 전체를 이 자리에서 인용해본다. 여러분이라면 저 세 단어로 짜인 단문을 어떤 역문으로 완성하겠는가?
"Feynman tinkered with radios again at the century’s big event. Someone passed around dark welding glass for the eyes. Edward Teller put on sun lotion and gloves. The bomb makers were ordered to lie face down, their feet toward ground zero, twenty miles away, where their gadget sat atop a hundred-foot steel tower. The air was dense. On the way down from the hill three busloads of scientists had pulled over to wait while one man went into the bushes to be sick. A moist lightning storm had wracked the New Mexican desert. Feynman, the youngest of the group leaders, now grappled more and more urgently with a complicated ten-dial radio package mounted on an army weapons carrier. The radio was the only link to the observation plane, and it was not working."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번역
+ 과학도 번역이 되나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살펴보자. 먼저 'dense'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당연히 density가 high하다는 표현이라고 일착으로 의미가 다가왔다. 그렇게 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자, 그럼 어떤 장면에서 나온 문장인지부터 보자.
때는 트리니티 원자폭탄 실험 직전, 7월의 새벽이다. 이 상황을 묘사하는 가운데 등장한 이 문장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미국 남서부 사막 지대의 새벽, 사실 여기서부터 좀 헤매게 되는 시점이다. 고산 지대 공기 밀도가 높나? 오히려 희박하지 않나? 그러니까, 공기 밀도가 높다는 표현이 dense하다는 말만 봐서는 이상하지 않을지 몰라도, '무대' 배경을 고려하면 개념이 어긋난다. 게다가 전후 문장의 흐름 가운데 들어간 'a moist lightning storm'이 실마리 역할도 한다. 돌아보고 나서 하는 소리지만, collocation에 조금만 익숙해도 이런 일착의 착각은 바로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엔 불필요한 논리적 늪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한 가지 궁리라고는 이러했던 기억이 난다. "air"를 분위기 정도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곧, 바로 앞에서 원자폭탄이 터질 터라, 그로 인한 긴장감이 빽빽하게, 말 그대로 'dense'(!)하게 감도는 현장을 전하려는 의도로 다가왔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오죽 갑갑할까? 문맥의 느낌도 그편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는 했다. 아마 숨을 제대로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쉬기 어려웠을 만큼 긴박한 장면으로 비쳤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숨이 막혔다.'라고 짧은 호흡으로,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지나감으로써 그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던 의미를 지닌 셈일까?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다가 결국 역어가 확정된다. 혹시 모를 오역을 피하기 위해서도 제법 고민이 따른다. 하지만 문제가 정말 없을까?
돌아보면, 번역이란, 개념적 정합성을 위배해서도 안 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결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일이다. "dense"는 뿌연 시야, 시각적 흐림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안개나 공기가 자욱한 광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오역보다는 의역에 가깝게 굳이 시도한다면, 공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는 정도로 표현하면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냥 straightforward하게 옮기고 나머지 여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라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개정판 계획은 따로 없던 터라 점점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 (가장 먼저 고치고 싶은 문장이라고 했지만, 고치고 싶은 유일한 문장이기도 했다. 그만큼 100% 완벽히 하려 최대한 애쓴 역작이기도 하다(그 단순한 오탈자마저 하나도 안 남기려는 100%에는 본의 아니게 실패했지만, six sigma 정도는 충족한 듯하다! ^^).
그러다가, 원작이 워낙 출중하므로, 눈독을 들이던 타 출판사에서 타 공역자를 통해 한국어판을 오랜만에 출간했다. 실은 필자에게도 재번역 의사 문의가 있었으나,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흐지부지되고 10년 이상이 흐른 뒤, 원작의 관점에서 재출간이지만, 한국어판의 관점에서는 그냥 다른 책으로 독자를 기다리게 되었다. 서점 매대에 깔린 책을 집어 들자마자, 당연히 이 부분부터, 그리고 역자 소개란을 확인했다.
잠깐, 역자 배경 이야기를 짚어보고 가자. 해당서를 번역하는 내내, 주인공이 미국인인 만큼, 물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배경 속에서 선명한 미국적 감을 잡아야 하는 장면이 자꾸 나오는데, 어떤 때는 미국으로 직접 취재라도 갔으면 하는 생각도 제법 들었다. 당시에는 미국을 한 번이라도 가기 전이었던 반면, 후속으로 나온 한국어판의 역자는 미국을 경험한 배경이 있어서, 여러 면에서 필자보다는 유리하고 번역 전체도 더 나으리라 생각했고, 더군다나 공역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평가는 여전히 시기상조라 보류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특정한 문제의 문장으로 이슈를 좁혀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사실 오역이거나 적어도 과역(over-translation)으로 남은 표현과 거의 비슷한 문장을, 전혀 관여하지 않은 신간에서 다시 만났으니, 참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단 한 글자만 다른 이 번역은 그 표현 자체가 더 극적이었으므로, 현장의 분위기를 심하게 왜곡한 오역의 범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우연인지 표절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묘한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이상한 일이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의 아이러니가 슬쩍 머리를 내민다. 정답은 없고, 해석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오역은 경계가 어딘지 몰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역자는 추론이나 추정 위에서 작업하기 일쑤지만, 그 추정이 작가의 진의를 배반하지 않도록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대로는 작가마저도 침묵한다. 나아가 그 긴장은 때때로, 역자 스스로 자신을 갉아먹는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그림자 속에 머물 줄 아는 불안, 그것은 역자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민의 정점에서도 전혀 가시지 않는 의구심에, 다행히(?) 살아 있는 저자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몇 차례 보낸 문의 가운데서 유일하게 답이 없는 부분이었다. 너무 trivial한 문의라 여겨서였을까? 저자는 유려하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문체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원작은 퓰리처상 후보작이기도 했다(사실, 그래서 한국어로 그럴 만한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는 역자가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필자는 출판사를 꽤 오래도록 피해 다녔다.). 저자의 무응답과 문체를 고려하면, 적어도 신 한국판의 번역은 필자의 선택보다도 무리였다. 그냥 간명하게 장면을 묘사하면서 역사적 순간의 무게감과 긴장감을 간접적으로 내포한 대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오역은 누구든지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역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대로 또는 비슷하게 반복된다면, 의도적이라면 개인적, 또는 우연이라면 구조적 문제라 보인다. 비단 필자의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아마도 여러 차례 다른 역자의 손을 거친, 일명 '세계적인' 문학 작품의 번역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역자의 개인 윤리 의식 문제지만, 한편으론 사람이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부분 표절을 방지할 제도적 보호 장치 또한 적절히 강화되어야 할 터다. 표절이냐 공명이냐, 종잇장, 아니 정말 나노 스케일의 차이 아닐까?
PS: 해당 문장이 포함된 문단 전체를 이 자리에서 인용해본다. 여러분이라면 저 세 단어로 짜인 단문을 어떤 역문으로 완성하겠는가?
"Feynman tinkered with radios again at the century’s big event. Someone passed around dark welding glass for the eyes. Edward Teller put on sun lotion and gloves. The bomb makers were ordered to lie face down, their feet toward ground zero, twenty miles away, where their gadget sat atop a hundred-foot steel tower. The air was dense. On the way down from the hill three busloads of scientists had pulled over to wait while one man went into the bushes to be sick. A moist lightning storm had wracked the New Mexican desert. Feynman, the youngest of the group leaders, now grappled more and more urgently with a complicated ten-dial radio package mounted on an army weapons carrier. The radio was the only link to the observation plane, and it was not working."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번역
+ 과학도 번역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