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천호(대기과학자)
“위기란 낡은 것은 사라져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을 때 생겨난다. 이 부재의 시간이야말로, 온갖 병적 증상들이 나타나는 때이다.”_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내가 청년이었던 시절, 우리나라는 군사정부가 지배했다. 억압의 실체는 명백했고, 저항의 이유 또한 분명했다. 그 당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구호 아래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날이 오면 민주주의가 꽃피우게 될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모든 것이 명료했던 시절이었다. 적은 분명했고, 목표는 선명했으며, 승리의 순간은 눈앞에 그려졌다.
이제, 낡은 세력은 사라졌지만, 새 세상은 여전히 저 멀리에 머물러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 삶의 기반을 위협하고 불평등은 공동체의 연대를 무너뜨린다.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 동력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세상은 훨씬 다양해졌다. 더 이상 모두가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저마다 꿈은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우선순위도 다르고, 때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명료한 구호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단순한 구호를 외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는 지워질 수도 있다. 이 흩어진 목소리들 앞에서 우리는 뭉치지 못하여 새 세상을 향한 전진은 더디기만 하다.
지금 거대한 폭포수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빗물은 끊임없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다. 빗물들이 모여 지형에 따라 구부러지기도 하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 고이기도 한다. 결국 모든 물은 바다로 향한다. 지금 우리의 다양한 목소리들도 어쩌면 바다로 가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내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자의 다름을 엮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행위자-연결망
인류는 유례없는 문명을 이룩하며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바로 그 성공이 기후위기를 초래하여 문명 자체의 붕괴 가능성 앞에 서게 되었다. 기후 재난은 자연이 만들어낸 불가항력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 따르면, ‘행위자’란 차이를 만드는 모든 것이다. 비인간은 의도를 가진 행위자가 아니지만, 다른 존재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행위자다. 그것은 미생물일 수도, 법률일 수도, 바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이다.
이산화탄소 분자는 화학물질인 동시에 화석연료 인프라, 경제 시스템, 국제 협상을 뒤흔드는 행위자이다. 녹아내리는 빙하는 해수면 상승을 통해 해안 도시의 계획과 법규를 수정하도록 강요하는 정치적 행위자이다. 동토지대 메탄은 침묵 속에서 돌연 기후 격변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행위자다. 대기, 해양, 생태, 기술, 에너지, 제도, 바이러스, SNS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이 행위자다.
행위자들은 서로 얽혀 각자 방식대로 행위의 물결을 일으키고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 생명과 물질이 뒤섞인 거대한 연결망을 형성한다. 개체가 환경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 자체가 이미 환경이다.
임계 영역
우리는 공기, 물, 흙, 생태계가 결합한 ‘임계 영역(Critical Zone)’ 안에서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다. 임계 영역은 지구를 농구공으로 비유한다면 그 보호 코팅만큼이나 극히 얇다. 그러기에 지구 역사에서 수많은 생물이 임계 영역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사라졌다. 생존은 특별한 예외이며, 멸종은 자연의 평범한 리듬이었다. 인류는 다른 멸종한 종들과는 달리, 스스로 기후변화를 일으켜 그 위험을 향해 가고 있다.
기후는 인간과 비인간이 오랜 기간 밀접하게 얽히고 서로 간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현재 기후는 지금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물을 느끼지 못한다. 물 밖으로 던져졌을 때야 비로소 물의 존재를 깨닫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후를 느낄 수 없어야 정상이다. 물고기에게 물이, 우리에게는 기후다. 그런데 우리가 일으킨 지구 가열로 인해 바다는 뜨거워지고, 대지는 가뭄에 갈라지며, 농지는 폭우에 침수하고, 숲은 산불로 타오르며, 빙하는 붕괴하고 있다. 이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는 기후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우리의 공격으로 절대 죽지 않는다. 단지 변형되어 우리를 공격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현상들은 “이제 그만하라”라고 외치는 행위자처럼 우리 앞길을 막는다.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 역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투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낸다. 러브록에게 가이아가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빚는 자기조절적 시스템이라면, 라투르의 가이아는 우리 행위에 반응하고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자다. 이 가이아는 ‘어머니 지구’처럼 자애롭지 않다. 그녀는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 가이아는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 곳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점화(Punctualization): 닫힌 블랙박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지구를 무한한 자원의 저장고이자 폐기물의 쓰레기장처럼 다뤄왔다. 우리는 한쪽 끝에서 자원을 투입하고, 다른 쪽 끝에서 상품을 생산하거나 폐기물을 배출하며 그 중간 과정은 보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에어컨을 켜면 시원해지며, 자동차를 타면 목적지로 이동한다. 이 편리함의 배후에 있는 복잡한 비인간 행위자들의 연결망은 가려져 있다.
라투르는 실제로 복잡한 연결망을 단순한 점(point)-물건이나 서비스-으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점화(Punctualization)’라고 불렀다. 점화는 수많은 절차·표준·투자·인프라·노동·자연 등이 성공적으로 결합해 하나처럼 행위를 하는 상태다. 점화는 블랙박스를 만드는 과정이고, 블랙박스는 점화의 성공적인 결과이다. 블랙박스는 내부 문제를 볼 수 없어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든다.
탈점화(Depunctualization): 열리는 블랙박스
그러나 블랙박스는 영원히 닫혀 있을 수 없다. 자동차가 고장 나는 순간, 운전자는 더 이상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물체로 경험하지 않는다. 운전자는 자동차 내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사가 풀리고, 배선이 타버린 복잡한 내부가 드러난다. 지구 역시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녹고, 전례 없는 홍수가 도심을 집어삼킬 때, 기후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기후위기는 블랙박스를 강제로 열어젖힌다. 점화가 깨지고 '탈점화(Depunctualization)'가 일어난다.
화석연료는 에너지라는 강력한 비인간 행위자로 등장한다. 화석연료의 추출과 정제, 이를 소비하는 발전소, 자동차, 공장 등의 기술 행위자들이 연결망을 더욱더 고착화시킨다. 경제 성장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인간 행위자(기업, 소비자, 정치인)들은 화석연료와 기술의 행위자와 동맹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미래 세대, 생태계, 사회적 약자와 같은 주요 행위자들은 연결망에서 배제되거나 침묵 당한다. 기후위기는 이렇게 ‘파괴적 연결망’이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라투르는 “위기가 닥친다고 해서 인류가 자동으로 단결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경고한다. 위기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기후위기가 단순히 과학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고의라고 지적했다. 엘리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연결망을 보이지 않게 블랙박스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파국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폭우와 폭염이 더 잦아지고 더 강해져도 대응은 더디고, 온실가스 배출은 여전히 줄지 않는다. 일시적 위험이 일어난다고 해도 곧 잊혀지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오히려 위기 앞에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거나, 혐오와 배제로 뭉친 폐쇄적인 집단주의로 빠져들거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거나, "어차피 끝났다"라는 냉소로 퇴각하기 쉽다.
재점화(repunctualization): 더 나은 블랙박스
기후위기 대응은 우리가 매 순간 "지구를 구해야 해"라고 의식하며 애쓰는 삶이 아니라, 생태적 삶이 너무나 당연한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컨대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디서 왔고 폐기되는지를 굳이 추적하지 않아도, 그 제품 자체가 이미 완벽한 순환과 재생의 연결망 속에서 만들어졌기에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태이다.
행위자-연결망의 관점에서 기후위기 대응이란, 파괴적 연결망에서 배제되었던 행위자들-대기, 해양, 생태계, 미래 세대, 멸종 위기종, 사회적 약자, 재생 에너지, 자원 순환 등-을 연결망에 참여시켜 재배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구를 지배하는 자’에서 ‘지구에서 함께 거주하는 자’로 신분을 바꿔야 한다. 이는 기존 블랙박스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점화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재점화(repunctualization)’ 과정이다.
점화-탈점화-재점화는 반복된다. 재생에너지가 재점화되어 새로운 표준이 되면, 희토류 채굴, 태양광 패널 폐기물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드러나 탈점화된다. 그러면 다시 순환경제, 모듈 설계와 같은 재점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은 완벽한 한 번의 점화로 완성되지 않는다. 더 나은 점화를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사물의 의회
재점화의 정치적 귀결이 라투르가 제안하는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다.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물의 의회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이다.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뉴질랜드는 왕거누이 강에 법인격을 부여했고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의 권리를 명시한다. 기후소송에서 미래세대를 대리하는 법적 장치들이 시도되고 있다. 비인간 행위자는 직접 말하지 않지만, 데이터, 영향평가, 지역 지식, 감시지표 등 다양한 매개를 통해 이해관계로 번역되어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비인간 행위자의 정치적 참여는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만 아니라, 책임을 더 정확히 묻는 데 필요하다. “사람이 잘못했다”로 끝나면, 어떤 제도, 기술, 관행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지 놓치기 쉽다. 반대로 “구조가 문제다”로 끝나면, 지금 여기에서 개입할 주체가 흐릿해진다. 라투르 연결망은 책임이 실제로 작동하는 경로를 추적한다. 누가 무엇을 설계했고, 어떤 표준이 채택됐고, 어떤 센서가 무엇을 측정했고, 어떤 지표가 무엇을 가렸는지, 이 질문들이 책임을 ‘도덕’에서 ‘배치와 설계’로 옮긴다. 그리고 배치와 설계는 바꿀 수 있다.
틈새에서 길을 엮다
새로운 연결망은 어디서 시작될 수 있는가? 라투르는 거창한 전략보다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는 역량’을 강조한다. 기후위기를 낳는 체제는 견고해 보이지만, 실상은 수많은 불안정한 연결의 집합이다. 그 안에는 재구성이 가능한 틈새가 있다. 그러기에 계획이 어긋난 틈,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물, 예기치 않은 만남에 민감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판사가 아니라 탐정이 되어야 한다. 판사는 이미 주어진 법에 따라 사건을 판단한다. 하지만 탐정은 현장에 남겨진 미세한 흔적들을 따라가며 사건이 어떻게ᅠ발생했는지를 추적한다. 불확실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진 답을 찾는 판사의 법봉이 아니라, 끈질기게 추적하여 새로운 연결망을 직조해 내는 탐정의 돋보기이다.
지난 성공은 언제나 필연처럼 회고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ᅠ사소한 연결들, 실패할 뻔했던 위기들,ᅠ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결합한 결과다. 탐정의 시선에서 보면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ᅠ연결의 궤적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기후 피켓, 하나의 법안 문구, 하나의 도시 재생에너지 조례, 하나의 금융 규제, 하나의 교육과정, 하나의 국제 협상 문단, 하나의 지방선거, 하나의 투자 결정과 같은 작은 결정들이 모여야만 거대한 전환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이 점에서 우리 각자의 작은 행위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행위자-연결망 시각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보면, ‘실패’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 기회의 창을 수없이 흘려보낸 과정이다. 반대로 ‘성공’ 역시 극적인 한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축적과 미리 준비된 대안들이 포착된 계기와 맞물려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의무 통과 지점
라투르는 인류가 무한 성장을 꿈꾸며 공중에 떠 있었으나, 이제는 기후위기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지구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 착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의무 통과 지점(obligatory passage point)’은 우리가 안전하게 착륙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제소이다. 각 행위자는 의무 통과 지점을 통해 흩어지지 않고 연결망으로 묶어진다.
얇고 깨지기 쉬운 임계 영역은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이다. “여기에 어떻게 안전하게 착륙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무엇을 우리 모두의 의무 통과 지점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의무 통과 지점은 인간이 설계한 세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중력 가속도처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물리 법칙이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탄소 중립, 파리협정, IPCC 보고서는 모든 행위자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의무 통과 지점이다. 기업도, 정부도, 개인도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도록 연결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연결, 축적, 확산
우리는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행위자이지만 그 결과 기후위기를 당하는 감수자(patient)이기도 하다. 연결망 속에서 누구도 순수한 행위자나 순수한 감수자가 아니다. 모두가 서로를 만들고(make), 서로에게 만들어진다(made). 감수한다는 것은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다. 그것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감지하고 반응하는 역량이다.
감수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상쇄하는 내적 저항력을 축적한다. 감수자가 강력한 행위자로 돌변하는 마법은 연결망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은 감수자가 축적한 저항력들이 연결망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한 결과다.
2018년 스웨덴의 한 소녀가 의회 앞에서 혼자 시위를 시작했을 때, 그것은 미약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 행위는 SNS를 통해 다른 청소년들과 연결되었고, 언론과 연결되었고, 과학자 공동체와 연결되었다. 결국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오는 기후 파업으로 까지 확산되었다. 그레타 툰베리는 감수자에서 강력한 행위자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연결망을 통해 강력한 행위자가 '된' 것이다.
태양광 패널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한 것은 어느 한 기업의 혁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기후활동가들의 압력, 정부의 보조금 정책, 기술혁신과 대량 생산, 소비자의 수요 증가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확산한 결과다. 여러 국가에서 신규 발전 단가 기준으로 태양광이 기존 에너지보다 낮아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약했던 재생에너지가 강력한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라투르는 힘이란 본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작은 결심에서, 한 공동체의 작은 실험에서, 한 기술의 작은 개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이 연결되고, 축적되고, 확산하면서,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 일어난다.
방향은 연결망의 결과다
이 세상은 옳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후위기 앞에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라투르에 따르면, 이 무력감은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연결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연결망을 직조할 것인가? 어떤 행위자들과 동맹을 맺을 것인가? 미래는 정해진 파국도, 약속된 구원도 아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의 과제는 희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점까지 데려왔는지, 그리고 어떤 연결망이 우리를 다른 미래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추적하고, 엮어야 한다.
기후위기 그 자체는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결은 방향을 만든다. 그 방향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연결망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방향은 지금, 이순간 우리가 어떤 연결을 선택하고 직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에 의해 소유되었다._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조천호(대기과학자)
내가 청년이었던 시절, 우리나라는 군사정부가 지배했다. 억압의 실체는 명백했고, 저항의 이유 또한 분명했다. 그 당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구호 아래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날이 오면 민주주의가 꽃피우게 될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모든 것이 명료했던 시절이었다. 적은 분명했고, 목표는 선명했으며, 승리의 순간은 눈앞에 그려졌다.
이제, 낡은 세력은 사라졌지만, 새 세상은 여전히 저 멀리에 머물러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 삶의 기반을 위협하고 불평등은 공동체의 연대를 무너뜨린다.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 동력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세상은 훨씬 다양해졌다. 더 이상 모두가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저마다 꿈은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우선순위도 다르고, 때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명료한 구호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단순한 구호를 외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는 지워질 수도 있다. 이 흩어진 목소리들 앞에서 우리는 뭉치지 못하여 새 세상을 향한 전진은 더디기만 하다.
지금 거대한 폭포수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빗물은 끊임없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다. 빗물들이 모여 지형에 따라 구부러지기도 하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 고이기도 한다. 결국 모든 물은 바다로 향한다. 지금 우리의 다양한 목소리들도 어쩌면 바다로 가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내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자의 다름을 엮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행위자-연결망
인류는 유례없는 문명을 이룩하며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바로 그 성공이 기후위기를 초래하여 문명 자체의 붕괴 가능성 앞에 서게 되었다. 기후 재난은 자연이 만들어낸 불가항력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 따르면, ‘행위자’란 차이를 만드는 모든 것이다. 비인간은 의도를 가진 행위자가 아니지만, 다른 존재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행위자다. 그것은 미생물일 수도, 법률일 수도, 바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이다.
이산화탄소 분자는 화학물질인 동시에 화석연료 인프라, 경제 시스템, 국제 협상을 뒤흔드는 행위자이다. 녹아내리는 빙하는 해수면 상승을 통해 해안 도시의 계획과 법규를 수정하도록 강요하는 정치적 행위자이다. 동토지대 메탄은 침묵 속에서 돌연 기후 격변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행위자다. 대기, 해양, 생태, 기술, 에너지, 제도, 바이러스, SNS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이 행위자다.
행위자들은 서로 얽혀 각자 방식대로 행위의 물결을 일으키고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 생명과 물질이 뒤섞인 거대한 연결망을 형성한다. 개체가 환경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 자체가 이미 환경이다.
임계 영역
우리는 공기, 물, 흙, 생태계가 결합한 ‘임계 영역(Critical Zone)’ 안에서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다. 임계 영역은 지구를 농구공으로 비유한다면 그 보호 코팅만큼이나 극히 얇다. 그러기에 지구 역사에서 수많은 생물이 임계 영역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사라졌다. 생존은 특별한 예외이며, 멸종은 자연의 평범한 리듬이었다. 인류는 다른 멸종한 종들과는 달리, 스스로 기후변화를 일으켜 그 위험을 향해 가고 있다.
기후는 인간과 비인간이 오랜 기간 밀접하게 얽히고 서로 간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현재 기후는 지금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물을 느끼지 못한다. 물 밖으로 던져졌을 때야 비로소 물의 존재를 깨닫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후를 느낄 수 없어야 정상이다. 물고기에게 물이, 우리에게는 기후다. 그런데 우리가 일으킨 지구 가열로 인해 바다는 뜨거워지고, 대지는 가뭄에 갈라지며, 농지는 폭우에 침수하고, 숲은 산불로 타오르며, 빙하는 붕괴하고 있다. 이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는 기후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우리의 공격으로 절대 죽지 않는다. 단지 변형되어 우리를 공격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현상들은 “이제 그만하라”라고 외치는 행위자처럼 우리 앞길을 막는다.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 역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투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낸다. 러브록에게 가이아가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빚는 자기조절적 시스템이라면, 라투르의 가이아는 우리 행위에 반응하고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자다. 이 가이아는 ‘어머니 지구’처럼 자애롭지 않다. 그녀는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 가이아는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 곳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점화(Punctualization): 닫힌 블랙박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지구를 무한한 자원의 저장고이자 폐기물의 쓰레기장처럼 다뤄왔다. 우리는 한쪽 끝에서 자원을 투입하고, 다른 쪽 끝에서 상품을 생산하거나 폐기물을 배출하며 그 중간 과정은 보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에어컨을 켜면 시원해지며, 자동차를 타면 목적지로 이동한다. 이 편리함의 배후에 있는 복잡한 비인간 행위자들의 연결망은 가려져 있다.
라투르는 실제로 복잡한 연결망을 단순한 점(point)-물건이나 서비스-으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점화(Punctualization)’라고 불렀다. 점화는 수많은 절차·표준·투자·인프라·노동·자연 등이 성공적으로 결합해 하나처럼 행위를 하는 상태다. 점화는 블랙박스를 만드는 과정이고, 블랙박스는 점화의 성공적인 결과이다. 블랙박스는 내부 문제를 볼 수 없어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든다.
탈점화(Depunctualization): 열리는 블랙박스
그러나 블랙박스는 영원히 닫혀 있을 수 없다. 자동차가 고장 나는 순간, 운전자는 더 이상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물체로 경험하지 않는다. 운전자는 자동차 내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사가 풀리고, 배선이 타버린 복잡한 내부가 드러난다. 지구 역시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녹고, 전례 없는 홍수가 도심을 집어삼킬 때, 기후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기후위기는 블랙박스를 강제로 열어젖힌다. 점화가 깨지고 '탈점화(Depunctualization)'가 일어난다.
화석연료는 에너지라는 강력한 비인간 행위자로 등장한다. 화석연료의 추출과 정제, 이를 소비하는 발전소, 자동차, 공장 등의 기술 행위자들이 연결망을 더욱더 고착화시킨다. 경제 성장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인간 행위자(기업, 소비자, 정치인)들은 화석연료와 기술의 행위자와 동맹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미래 세대, 생태계, 사회적 약자와 같은 주요 행위자들은 연결망에서 배제되거나 침묵 당한다. 기후위기는 이렇게 ‘파괴적 연결망’이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라투르는 “위기가 닥친다고 해서 인류가 자동으로 단결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경고한다. 위기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기후위기가 단순히 과학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고의라고 지적했다. 엘리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연결망을 보이지 않게 블랙박스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파국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폭우와 폭염이 더 잦아지고 더 강해져도 대응은 더디고, 온실가스 배출은 여전히 줄지 않는다. 일시적 위험이 일어난다고 해도 곧 잊혀지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오히려 위기 앞에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거나, 혐오와 배제로 뭉친 폐쇄적인 집단주의로 빠져들거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거나, "어차피 끝났다"라는 냉소로 퇴각하기 쉽다.
재점화(repunctualization): 더 나은 블랙박스
기후위기 대응은 우리가 매 순간 "지구를 구해야 해"라고 의식하며 애쓰는 삶이 아니라, 생태적 삶이 너무나 당연한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컨대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디서 왔고 폐기되는지를 굳이 추적하지 않아도, 그 제품 자체가 이미 완벽한 순환과 재생의 연결망 속에서 만들어졌기에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태이다.
행위자-연결망의 관점에서 기후위기 대응이란, 파괴적 연결망에서 배제되었던 행위자들-대기, 해양, 생태계, 미래 세대, 멸종 위기종, 사회적 약자, 재생 에너지, 자원 순환 등-을 연결망에 참여시켜 재배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구를 지배하는 자’에서 ‘지구에서 함께 거주하는 자’로 신분을 바꿔야 한다. 이는 기존 블랙박스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점화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재점화(repunctualization)’ 과정이다.
점화-탈점화-재점화는 반복된다. 재생에너지가 재점화되어 새로운 표준이 되면, 희토류 채굴, 태양광 패널 폐기물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드러나 탈점화된다. 그러면 다시 순환경제, 모듈 설계와 같은 재점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은 완벽한 한 번의 점화로 완성되지 않는다. 더 나은 점화를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사물의 의회
재점화의 정치적 귀결이 라투르가 제안하는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다.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물의 의회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이다.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뉴질랜드는 왕거누이 강에 법인격을 부여했고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의 권리를 명시한다. 기후소송에서 미래세대를 대리하는 법적 장치들이 시도되고 있다. 비인간 행위자는 직접 말하지 않지만, 데이터, 영향평가, 지역 지식, 감시지표 등 다양한 매개를 통해 이해관계로 번역되어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비인간 행위자의 정치적 참여는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만 아니라, 책임을 더 정확히 묻는 데 필요하다. “사람이 잘못했다”로 끝나면, 어떤 제도, 기술, 관행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지 놓치기 쉽다. 반대로 “구조가 문제다”로 끝나면, 지금 여기에서 개입할 주체가 흐릿해진다. 라투르 연결망은 책임이 실제로 작동하는 경로를 추적한다. 누가 무엇을 설계했고, 어떤 표준이 채택됐고, 어떤 센서가 무엇을 측정했고, 어떤 지표가 무엇을 가렸는지, 이 질문들이 책임을 ‘도덕’에서 ‘배치와 설계’로 옮긴다. 그리고 배치와 설계는 바꿀 수 있다.
틈새에서 길을 엮다
새로운 연결망은 어디서 시작될 수 있는가? 라투르는 거창한 전략보다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는 역량’을 강조한다. 기후위기를 낳는 체제는 견고해 보이지만, 실상은 수많은 불안정한 연결의 집합이다. 그 안에는 재구성이 가능한 틈새가 있다. 그러기에 계획이 어긋난 틈,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물, 예기치 않은 만남에 민감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판사가 아니라 탐정이 되어야 한다. 판사는 이미 주어진 법에 따라 사건을 판단한다. 하지만 탐정은 현장에 남겨진 미세한 흔적들을 따라가며 사건이 어떻게ᅠ발생했는지를 추적한다. 불확실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진 답을 찾는 판사의 법봉이 아니라, 끈질기게 추적하여 새로운 연결망을 직조해 내는 탐정의 돋보기이다.
지난 성공은 언제나 필연처럼 회고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ᅠ사소한 연결들, 실패할 뻔했던 위기들,ᅠ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결합한 결과다. 탐정의 시선에서 보면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ᅠ연결의 궤적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기후 피켓, 하나의 법안 문구, 하나의 도시 재생에너지 조례, 하나의 금융 규제, 하나의 교육과정, 하나의 국제 협상 문단, 하나의 지방선거, 하나의 투자 결정과 같은 작은 결정들이 모여야만 거대한 전환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이 점에서 우리 각자의 작은 행위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행위자-연결망 시각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보면, ‘실패’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 기회의 창을 수없이 흘려보낸 과정이다. 반대로 ‘성공’ 역시 극적인 한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축적과 미리 준비된 대안들이 포착된 계기와 맞물려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의무 통과 지점
라투르는 인류가 무한 성장을 꿈꾸며 공중에 떠 있었으나, 이제는 기후위기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지구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 착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의무 통과 지점(obligatory passage point)’은 우리가 안전하게 착륙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제소이다. 각 행위자는 의무 통과 지점을 통해 흩어지지 않고 연결망으로 묶어진다.
얇고 깨지기 쉬운 임계 영역은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이다. “여기에 어떻게 안전하게 착륙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무엇을 우리 모두의 의무 통과 지점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의무 통과 지점은 인간이 설계한 세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중력 가속도처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물리 법칙이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탄소 중립, 파리협정, IPCC 보고서는 모든 행위자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의무 통과 지점이다. 기업도, 정부도, 개인도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도록 연결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연결, 축적, 확산
우리는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행위자이지만 그 결과 기후위기를 당하는 감수자(patient)이기도 하다. 연결망 속에서 누구도 순수한 행위자나 순수한 감수자가 아니다. 모두가 서로를 만들고(make), 서로에게 만들어진다(made). 감수한다는 것은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다. 그것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감지하고 반응하는 역량이다.
감수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상쇄하는 내적 저항력을 축적한다. 감수자가 강력한 행위자로 돌변하는 마법은 연결망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은 감수자가 축적한 저항력들이 연결망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한 결과다.
2018년 스웨덴의 한 소녀가 의회 앞에서 혼자 시위를 시작했을 때, 그것은 미약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 행위는 SNS를 통해 다른 청소년들과 연결되었고, 언론과 연결되었고, 과학자 공동체와 연결되었다. 결국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오는 기후 파업으로 까지 확산되었다. 그레타 툰베리는 감수자에서 강력한 행위자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연결망을 통해 강력한 행위자가 '된' 것이다.
태양광 패널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한 것은 어느 한 기업의 혁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기후활동가들의 압력, 정부의 보조금 정책, 기술혁신과 대량 생산, 소비자의 수요 증가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확산한 결과다. 여러 국가에서 신규 발전 단가 기준으로 태양광이 기존 에너지보다 낮아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약했던 재생에너지가 강력한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라투르는 힘이란 본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작은 결심에서, 한 공동체의 작은 실험에서, 한 기술의 작은 개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이 연결되고, 축적되고, 확산하면서,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 일어난다.
방향은 연결망의 결과다
이 세상은 옳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후위기 앞에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라투르에 따르면, 이 무력감은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연결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연결망을 직조할 것인가? 어떤 행위자들과 동맹을 맺을 것인가? 미래는 정해진 파국도, 약속된 구원도 아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의 과제는 희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점까지 데려왔는지, 그리고 어떤 연결망이 우리를 다른 미래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추적하고, 엮어야 한다.
기후위기 그 자체는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결은 방향을 만든다. 그 방향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연결망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방향은 지금, 이순간 우리가 어떤 연결을 선택하고 직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