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푸른 빙하가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

고재현
2026-09-23
조회수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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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팔 대홍수 참사 장면을 뉴스로 보다가 문득 ‘빙하를 따라서(Chasing Ice)’란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2012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북극권 다양한 지점의 빙하가 녹으며 사라지는 장면을 수년에 걸친 타임랩스 영상으로 담아 기후위기를 세계적 이슈로 부각시킨 수작이다. 그린란드에서 미국 맨해튼 크기의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압도적 장면도 충격이었지만 내 기억에 더 선명히 남은 것은 갈라지고 녹아내리며 드러나던 빙하의 시퍼런 속살이었다.


수북이 쌓인 숫눈은 희다. 작가 한 강이 흰 것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정리한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눈’은 흰색의 상징이다. 반면 오랜 세월 눌리고 압착되어 공기방울마저 드물어진 거대한 얼음덩어리, 즉 빙하는 시리도록 푸른 빛깔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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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김기명>


눈송이를 이루는 깨알만한 눈 결정이나 커다란 얼음덩이나 물분자들이 결합해 이루는 미시적인 구조는 같다. 그래서 푸른 빙하 위에 쌓인 하얀 눈더미를 보며 둘이 같은 물질이라는 사실이 어색할 때도 있다. 얼음과 눈의 색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그 속을 통과해 지나가는 빛이 내달린 거리다.


산소 원자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수소가 결합한 물분자는 에너지를 흡수하며 여러 방식으로 진동한다. 분자들이 규칙적으로 결합한 얼음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의 진동이 발생한다. 이러한 진동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는 빛이다. 가시광선 중 빨간색 빛은 얼음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약하게 흡수되어 물분자를 진동시킨다. 냉커피 속 얼음 정도의 크기에서는 흡수가 미미해 얼음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그 크기가 수 m를 넘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거대한 빙하가 푸른 빛을 띠는 이유


막 쌓인 눈은 눈송이 사이사이로 공기층이 자리잡은 구조다. 눈더미로 입사된 빛은 눈송이를 이루는 얼음 알갱이와 공기 경계에서 수많은 굴절과 반사를 거치며 곧 표면으로 되돌아 나온다. 이 과정에서 빛이 눈송이의 얼음을 통과하는 총 거리는 대략 20cm 정도다. 반면 거대한 얼음덩어리인 빙하에 입사한 빛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먼 거리를 통과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빨간빛에 비해 대략 100배는 덜 흡수되는 파란빛이 주로 살아남아 반사되거나 산란되며 거대한 빙하를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특히 오랜 기간 눌려서 기포조차 듬성듬성한 깊은 곳의 빙하 속에선 빛이 산란되지 않고 더 먼 거리를 통과하면서 빨간빛을 흡수해 걸러내기에 푸른색이 더욱 진해진다. 이것이 균열된 빙하의 속살이 그처럼 푸르게 보이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빙하를 뒤덮은 만년설은 쏟아지는 햇빛을 강하게 반사하는 빙하의 보호막이다. 온난화로 눈이 녹으면 빙하의 맨얼음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렇게 노출된 얼음은 급격한 손실의 악순환에 들어선다. 빛의 반사율이 눈의 그것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빙하의 표면은 햇빛의 상당량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부 온도를 높인다.


2022년 국제공동연구팀이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의 사우스콜 빙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빙하는 지난 25년간 융해와 승화를 통해 55m를 웃도는 얼음을 상실했다고 추정한다. 이는 그 얼음이 형성되는 데 걸린 약 2천년의 시간을 고려하면 무려 80배나 빨리 사라진 속도다.


게다가 표면이 드러난 빙하는 오염에 취약하다. 화석연료 사용의 잔해물인 검댕이나 먼지, 빙하 조류의 서식으로 표면이 쉽게 오염된 빙하는 빛의 흡수를 촉진해 더 빨리 녹아내린다. 최근 히말라야 지역의 빙하 상태를 위성으로 추적한 연구는 고산 빙하의 표면이 꾸준히 어두워져 왔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빙하 내부로 흡수되는 빛은 얼음의 표면만 녹이는 것이 아니다. 깊이 침투해 흡수된 빛은 빙하의 내부에서 열로 바뀌어 갇히며 빙하의 융해와 균열에도 기여해 빙하의 구조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빙하의 구조적 취약화와 융해가 암석층과의 결합력을 약화시켜 이번 네팔의 암빙 붕괴를 초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기후행동 할 기회는 남아 있다


‘빙하를 따라서’는 해가 갈수록 산불의 규모와 빈도가 커지고 태풍의 강도도 강해지는 기후위기의 현장을 생생히 담아냈다. 다큐의 화자는 인류가 기후위기에 대처할 시간이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행동할 기회는 남아 있다고 호소한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26년, 인류는 다큐 속 장면보다 더욱 강력해진 태풍과 잦아진 빙하 붕괴,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극단적 폭염과 산불을 목도하는 중이다. 끝없이 방출되는 온실가스가 미래세대에 지울 재앙의 무게에 대한 공감이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의 흔적인 빙하의 푸른색은 이제 빙하의 손실을 상징하는 슬픈 색이자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서슬 퍼런 경고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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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현 (한림대학교 교수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사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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